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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간호문학상 - 수기 당선작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18-12-19 오전 09:17:24

내 마음의 깃발

이명숙(보건진료소장 퇴직)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틈만 나면 무언가를 쓰곤 했다. 국문과에 가고 싶었으나 기술 하나는 있어야 평생을 먹고 산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간호대학에 들어갔다. 간호학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공간지각능력이 부족하고 민첩하지 못한 나는 공부 과정을 따라가기에 숨이 벅찼다. 실습 시간에는 동료 학생들보다 매번 한 발자국씩 뒤쳐진다는 자괴감으로 자퇴를 생각한 적도 많았다. 남들이 단번에 알아듣는 것을 숙지하지 못해 나는 번번이 집에 와서 연습을 했었다. 주사를 놓는 데 성공하려고 인형의 엉덩이에 수없이 바늘을 꽂던 기억이 난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의 보건소에 발령을 받았다. 그 당시엔 간호 인력이 부족했고 더구나 농어촌은 지원자가 없어 취업하기가 수월했다. 이 지역에서 잠시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직장 동료였던 남편을 만나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때가 어언 40년 전이다.

큰아이를 낳고서 6개월의 정부 교육을 수료하고 보건진료원이 되었다. 보건진료소는 농어촌보건의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의촌인 오·벽지에 보건진료원을 배치하는 제도였다. 우리 마을 주민들이 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보건진료소에서 1983년 10월 1일자로 근무를 시작했다. 워낙에 낡은 건물이라 비가 내리면 진료소 곳곳에 빗물이 떨어져 그릇을 받치느라 바빴다. 쥐들은 또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지. 전화기는 진료소가 있는 우리 마을 70가구에 한 대 뿐이었는데 교환원을 통해야만 가능했다. 급한 전화가 걸려오면 이장님이 확성기에 대고 방송을 했으니 스마트폰이 만연된 지금으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교통수단은 털털거리는 비포장도로에 흙먼지 날리는 버스가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두 번만 드나들었다. 응급 환자가 발생했을 때 연락과 후송의 어려움으로 발을 동동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보건진료원은 진료소에 24시간 거주를 해야 하므로 늘 긴장 속에 살아야 했다. 주민들이 한밤중에도 진료소를 찾아오기에 나는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겉옷을 입고 자던 게 지금도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일요일에 읍내 목욕탕에 갔다가 자장면 한 그릇을 먹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날들이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를 미소 짓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논둑에 수줍게 피어있던 들꽃이다. 제비꽃, 자운영, 민들레 등은 하나같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다소곳하다. 누구 한 사람 눈여겨 보아주지 않아도 외진 뚝방 아래에서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가정방문을 하기 위해 농로 길을 걸으며 생각하곤 했다. 보건진료원이라는 직업은 눈에 확 띄는 장미나 튤립처럼 화려한 꽃이 아니라 누구 한 사람 알아주는 이 없어도 제 몫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들꽃이라고.

어느 날 나는 보건진료소 책상 위에 직업의 좌우명을 이렇게 써서 붙였다.

‘아픈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일하자’

진정한 의료인은 두 개의 선로를 잘 연결해서 환자가 순조로운 기차여행을 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아픈 사람들이 타고 갈 순탄한 기차여행을 위해 내가 준비할 선로는 무엇이었을까. 주민들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먼저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의 말이나 행동에서 진실이 묻어나면 그들은 나를 믿고 따라와 줄 테니까. 해마다 되풀이되는 삶의 여정 속에서 누구에게 보여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풀꽃들에게서 나는 신뢰를 배웠다.

 

어느 해인가, 폭설이 내렸다. 진료소에서 가장 먼 마을에 가정방문을 가기로 정해진 날이었다. 나는 온몸을 꽁꽁 싸매고 눈보라를 헤치며 한 시간을 걸었다. 사정없이 퍼붓던 눈은 내 몸에 이불처럼 쌓여 나는 그야말로 눈사람이 되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본 주민들은 경악을 했다. 많이 내린 눈으로 그날은 버스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에스키모처럼 내가 나타났으니 주민들이 놀랠 만도 했다. 그 겨울의 일은 주민들의 입소문으로 산마을을 타고 온 동네로 번져 한때 나는 전설이 되기도 했다.

그 사건을 짤막한 글로 써서 간협신보(현 간호사신문)에 투고했었다. 원고가 채택되어 실렸고 더욱 놀라운 일이 생겨났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어떤 간호사가 보건진료원이 되고 싶어 진료소를 한 번 가보고 싶었다는데 마침 신문에서 내 글을 읽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기이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내가 졸업한 간호대학의 후배였고 진료원이 되어서는 우연하게도 이 고장에 발령을 받았으니. 우리 부부는 중매를 섰고 그녀는 남편의 친구와 결혼을 했다. 내가 쓴 짧은 글로 후배가 이 지역의 보건진료소에서 근무하며 가정이란 둥지를 틀었다. 글이란 언제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우리 마을에도 노인 인구가 늘어서 나는 어르신들을 위한 사업에 주력했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버스를 오르내리는 것이 힘이 들어 읍내에 나가기가 어렵다. 나는 독거노인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녔다. 생필품이 떨어지면 사다 드리고 공과금도 은행에 가서 대신 납부해 주었다. 내가 한 일은 사실 소소한 것인데 그분들께는 중요한 일이었나 보다. 어르신들은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자식보다 낫다며 나를 추켜세웠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찌 좋은 날만 있겠나. 때론 역풍을 만나기도 한다. ‘시 보건소’에서 체육행사로 90명이 산에 갔다가 나는 산행 중에 발을 헛디뎌 벼랑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의식을 잃은 나를 보며 다들 죽은 줄 알았다고. 헬리콥터 수송기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사경을 헤매다가 사흘 만에 정신이 들었다. 어깨뼈와 쇄골의 심한 골절로 움직일 수 없던 나는 한 달을 병원에 누워 있다가 퇴원을 했다. 진료소를 너무 오래 비울 수가 없어 불편한 몸으로 출근을 했는데 주민들은 날마다 문병을 와 주었다. 어떤 할머니는 자식들이 주고 간 돈이라며 꼬깃꼬깃한 지폐를 내놓고 갔다. 할머니들은 교대로 밥이며 깨죽이며 반찬 등을 만들어 왔다. 내가 도와드려야 할 그분들에게서 보호를 받으며 나는 몸을 추슬렀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나는 나머지 인생은 덤이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늘 보던 하늘이 새롭게 다가왔다. 들꽃 하나라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주민들의 건강을 이론이 아니라 실생활에 접목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우선 걷기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어르신들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왕복 1시간 정도의 길을 정해서 날마다 오전 10시에 걸었다. 농사일이 바쁜 분들은 동참하기 어려웠지만 TV 앞에 앉았던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걷기 시작했다. 전국에 수많은 둘레길이 있지만 주민들과 함께 걷던 그 길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나는 보건진료소에서 33년간 근무를 했다. 내가 간호사로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 세월이었다. 나는 유능한 간호사는 못되었다. 눈썰미가 없고 굼뜬 나는 새로운 의료장비가 들어오면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 쩔쩔매곤 했다. 내성적이던 내가 천여 명의 주민들을 혼자서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다. 능력이 없는 간호사란 열등감에 자신을 움츠리며 살았지만 주민들한테는 그런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날들. 그 세월이 자그마치 33년이다. 내게 무슨 힘이 있어 그 긴 세월을 버티고 건너올 수 있었는지.

내가 그토록 어려워했던 간호사의 길, 그 임계점을 뛰어넘기 위해 애쓰던 몸짓이 가끔씩 떠오른다. 물이 끓기를 바라며 혼자서 수없이 땔감을 지피던 노력 끝에 비로소 해낼 수 있었던 성과들에 나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부족한 나를 믿어준 주민들의 힘이 컸다. 공무원이던 남편이 외지로 발령이 났을 때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진료소를 찾아왔었다. 내가 남편을 따라 전근을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진료소에서 단 한 번의 이동도 없이 말뚝처럼 이곳을 지키다가 나는 3년 전에 퇴직을 했다. 내가 은퇴한 후에 진료소는 구조조정으로 폐쇄가 되어 나는 이 마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근무자가 되었다. 20대에 시작해 60대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보냈던 직장이어서일까. 나는 지금도 진료소에서 일하던 꿈을 꾸곤 한다. 상급기관에서 내라는 서류를 다른 보건진료원들은 다 제출했는데 나만 마무리를 못해서 진땀을 흘리는 꿈. 진료소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내소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꿈 등. 꿈속에서의 내 집은 지금 사는 이 집이 아니라 여전히 진료소이며 등장하는 주민들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주민들에게 받은 사랑이 커서 그 고마움을 갚지 못해 그런 꿈을 꾸는 건 아닐지.

 

‘헨렌 니어링’이 지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책의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스코트가 백 번째 생일을 맞던 날 이웃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서 왔는데 그 깃발 하나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었다.’

나는 이 말을 남모르게 가슴에 품어왔다. 나도 언젠가 진료소를 떠나는 날 주민들이 깃발에 이렇게 써서 나오는 날을 그려보곤 했다.

‘이명숙 소장님, 당신이 33년간 이곳에 있어서 우리 마을이 더 좋아졌어요.’

내가 퇴직하던 날 주민들은 마을 입구까지 따라 나왔다. 병기 할아버지는 고추장, 된장을 항아리 째로 경운기에 싣고 오기도 했다. 주민들이 가져온 곡식이며 채소 과일로 내 차는 빈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떠나야 하는데 차마 시동을 걸지 못하던 나는, 내가 꿈꿔왔던 그 깃발을 인파 속에서 보았다. 관절염으로 잘 걷지 못하는 ‘이점순’ 할머니. 16살에 가마를 타고 이 골짜기에 시집을 와서 70년 가까이 살아온 어르신. 지팡이에 간신히 버티고 서서 손을 흔들던 그 연약한 팔에 깃발 하나가 희미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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