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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간호문학상 소설 가작
야경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14-12-16 오후 13:52:26
오주훈(삼육보건대 2학년)


택시 조수석 옆 백미러로 가로등이 보인다. 하나, 둘. 규칙적으로 가로등 불빛이 거울 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가로등 너머로는 검은 한강이 펼쳐져 있다. 백미러에서 차창으로 시선을 옮기니 강변의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새벽 1시 30분. 늦은 시간이었지만 드문드문 불이 켜진 창들이 있다. 밤. 도시의 밤은 강 너머 불빛들의 배열들 속에서 자신을 구현 중이다. 그것은 확실히 기하학과 미학의 원칙에 충실한 패턴과 같다. 틈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아름다움의 결정체.

한 시간 전, 난 지민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Bar)의 테이블과 의자는 온통 금속성 은빛이었고, 바닥은 유광의 푸른색으로 번득거렸다. 12년 산 제이 앤 비(J&B) 병을 만지작거리는 지민의 손은 유난히 더 창백해보였다. 그 흔한 네일아트의 흔적은 고사하고 어떤 매니큐어도 바르지 않은 손톱 역시 핏기가 없었다. 손목을 거쳐 팔꿈치, 그리고 어깨로 올라가는 선은 미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가녀리다거나, 마르다거나, 예쁘다거나, 섹시하다 등등의 형용사로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느낌. ‘세상의 끝’이라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손짓하는 어떤 여인을 볼 수 있다면, 그 손짓에서 풍길 법한 그런 느낌이었다. 팔과 어깨를 지난 곳에는 지민의 눈이 있었다. 검은 뿔테 너머로 나의 시선을 감싸고, 나의 시선에 답하는 눈. 18세기 황량한 고성(古城)을 품은 듯 한 눈. 그 눈을 보면서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적어도 지민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은 곧 그녀의 영혼 자체였고, 하나의 세계였다. 오직 영원한 것들만이 간신히 근접할 수 있는 극도로 고고한 세계.

서지민. 그녀를 처음 본 곳은 퇴근길 지하철이었다. 지상 구간으로 막 진입하면서 야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아마도 그 탓에 달라진 조명 빛의 배치 때문이었을까, 내가 서 있던 창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지민은 빨간색 목도리로 목과 머리의 일부를 두른 채, 뿔테 안경을 낀 무심한 자세로 나와 같은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도시적 분위기를 지닌 얼굴이었다. 동시에 이젠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고전 소설 속 인물의 빛바랜 이질감도 느껴졌다. 그 모호함은 그녀의 직업을 유추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직장인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일에 철두철미하면서 내성적이지만, 주말 아침이면 고급 호텔의 침대에서 은밀한 포즈로 늦잠을 잘 것 같았다. 대학원생이라고 한다면, 착실하고 논리 정연한 박사과정 학생이지만, 내심 자신의 지도 교수와 동료들은 물론이고 세상을 지독히 혐오하면서 끝없는 낙서로 밤을 샐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주부였을 수도 있는데, 가사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며 남편에게서 불평 한 마디 없을 정도로 밥을 잘 하고, 집안 청소에도 소홀한 법이 없으며, 이른바 내조에 빈틈이 없지만, 집안일을 하지 않을 때면, 단 1초도 다른 일에 시간을 쓰지 않고, 오직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를 읽고 또 읽으며 소설 속 로즈마리가 되어 남불 리비에라 해안을 거닐 것 같았다.

서지민의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와 거기에서 촉발된 여러 상상적 추론이 의미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건 내가 그녀에게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눈길을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난 그 점을 깨달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시선으로 받아치고 있었다. 지리멸렬함을 거부하는 완고한 어떤 것이 그녀의 시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긴 시간, 흔한 잡담과 삶들 사이에서 홀로 침묵을 견지해온 흔적이 보였다. 당신은 고독했나요, 라고 묻는다면, 그저 냉소로 대꾸할 법한 초연함이 엿보였다. 그녀와 내가 주고받는 시선은 유혹의 눈길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을 계기로 우리가 만나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불륜이라고 부르는 관계로까지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 서로의 눈길 속에서 본 것은 육감적이거나, 정열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컨대 우리를 식상한 문법의 규칙에 종속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세 정거장을 지난 뒤 그녀는 열차에서 내려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어깨에 맨 핸드백을 한 손으로 고정한 채 약간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나는 뒤를 따랐고, 그녀가 그런 나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역 앞 카페를 그녀는 망설임 없이 들어갔고, 나 역시 그녀가 자리 잡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꼰 채 목도리를 벗은 뒤 지하철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제 서야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르는 여자를 쫓아와 테이블 맞은편에 앉는 것 자체가 내게는 대담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태도에는 분명 도발적인 면이 다분했다. 밤 10시. 한 번도 내려 본 적이 없는 역 앞 카페. 나를 마주한 낯선 여인. 상황이 주는 중압감에 나는 그녀와 얼마나 이야기를 하게 될지, 제 시간에 집에 들어갈 수는 있을지, 아내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등, 사소한 계산들 속으로 도피하려고 했다. 그때 지민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주문하시겠어요?”

저음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심야 라디오 프로의 진행자에 어울릴 듯한 목소리. 나는 얼떨결에 무슨 커피 종류를 말했고, 그녀는 계산대에서 주문을 한 뒤 직접 잔을 가지고 왔다. 얼마간 자신의 커피를 음미한 지민은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이 나왔다.

“여행 좋아하세요?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프랑스 파리에 유학 중인 이모를 만나러 처음 해외여행을 갔었죠. 남들 가는 관광지는 다 가봤어요.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개선문, 몽마르트 언덕, 노트르담 성당 같은 곳들이요. 그런데 여행 책에 나와 있는 사진과 똑같은 건물들을 볼 수 있었고, 여행 책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가 없었죠. 뭐가 좋은지 감탄사를 내지르며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들도 보기가 싫었어요.

그래서 남은 기간 동안에는 일부러 교외 지역의 인적이 드문 곳만 찾아다녔어요. 살풍경한 공장들이 늘어선 거리나, 아랍 이민자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는 서민 아파트, 순환 도로가 주변의 낡은 상점들, 뭐 그런 곳들이요. 한국도 그렇겠지만, 프랑스 교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것이 뭔지 아세요? 철조망이었어요. 녹이 슬고, 칠이 벗겨졌으며, 어딘가는 구멍이 뚫린 뒤틀린 철조망이 어디에나 있었어요. 공장에도, 버려진 저택 근처에도, 아파트 입구에도, 도로와 보도를 나누는 경계에도, 심지어 놀이터에도 철조망이 있었어요.

하루는 생 드니라고 파리 북쪽의 평판 안 좋은 동네를 걷고 있었어요. 프랑스의 대표적인 할렘답게 시시껄렁한 아랍인들과 흑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어왔고 위협적인 몸짓을 취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저를 실제로 건드리지는 못했어요. 겁도 없이 우범 지대를 걷고 있는 이국의 어린 학생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던 모양이죠.

그러다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터에 이르게 되었어요. 외국 영화에 흔히 나오는 농구대가 있는 그런 공터 말이에요. 그런데 그곳의 철조망은 무척 깔끔했고 은빛으로 반짝이기까지 했어요. 온통 낡은 간판과 쓰레기들이 뒹구는 황량한 할렘에는 어울리지 않는 철조망이었죠. 제가 내심 감탄을 하면서 철조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한 아랍 남자애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어요.

그 아이는, 짧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버짐이 피어 있고 얼굴에는 교외에 사는 아랍 애들 특유의 회색빛 색조가 두드러졌고 남루한 점퍼에서는 눅눅한 곰팡내가 났어요. 말할 때마다 드러난 치열은 완전히 엉망이었고 자세도 어딘가 흐트러진 것이 방금 약이라도 먹고 온 것 같았죠. 제2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덕분인지 심한 아랍 사투리가 섞인 그 애의 불어도 대충 알아들었지요. 어디서 왔냐? 일본이냐 중국이냐? 그 철조망은 얼마 전 자기가 새로 페인트칠을 한 거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철조망 페인트칠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더 열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어요. 다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자기 형이 공장에 취직을 해 자기한테 용돈을 줄 수 있게 되었고, 처음에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여자애들이랑 노는 데 쓰거나, 마리화나를 사는 데 쓰려고 하다가, 그래도 형이 고생을 해서 번 돈이라는 생각에 좀 그럴싸한 곳에 쓰기로 결심을 했대요.

그러다가 생각난 것이 철조망을 수리하고 칠을 다시 하는 것이었대요. 방과 후면 늘 형이랑 그 공터에서 농구를 하던 기억이 있는데, 다른 아이들도 서로 농구를 하며 우정 같은 걸 쌓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제가, 어린 나이에 참 대견한 생각을 했구나, 라고 칭찬을 하니, 그 애는 얼굴이 벌게지더니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맙다고, 주변에선 다들 쓸데없는 것에 돈을 썼다고 놀리기만 했는데, 그런 칭찬을 처음 듣는다면서 수줍게 웃으며 좋아하는 기색을 나타냈어요.

저는 그 애와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와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서 함께 햄버거를 사먹었고, 파리 시내도 구경했어요. 그 애는 쉴 새 없이 프랑스와 아랍과 생 드니와 자기 형과 주변 친구들과 자신이 만난 못생긴 여자애들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그러면서 언젠가는 돈을 모아 이 지긋지긋한 프랑스를 떠나 아프리카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낙타 농장이나 운영하며 밤에는 사막의 별자리를 노트에 그리며 사는 게 소원이라는 말도 했어요. 제가 그 꿈에 대해서 멋지다고 칭찬을 하니까 방방 뛰면서, 그렇지? 멋지지? 라고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어요. 날이 저물어 헤어질 무렵, 우리는 세느 강변에서 키스를 나누었어요. 저에겐 첫 키스였죠. 그 애는 꼭 편지하라고, 나중에 자기 농장에서 같이 살자고 제게 다짐을 받았어요. 물론 그 후에 편지나 연락은 서로 없었지만요.”

뜻하지 않은 지민의 긴 서론에 나는 당황했다. 요컨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프랑스에서 후줄근한 아랍 남자애와 첫 키스를 했다는 게 요지인가, 그게 의미하는 게 뭘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 아랍 애와 닮았다든가 따위의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어느 모로 보아도 당신은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이는 삼십 대 직장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그 아랍 애와 나누었던 것과 같은 키스를 당신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아까 지하철에서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에 말이죠. 그 키스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죠. 싸구려 립스틱을 온 입술에 묻혀가며 요란하게 키스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에게만 들리는 빗소리에 맞춰서 나누는 그런 키스, 거의 숭고하기까지 한 의미를 지닌 그런 키스말예요. 제 예감이 맞는지는 일단 키스를 해보면 알아요. 그동안 많은 남자들과 키스를 했지만 누구도 제게 그 세느 강에서의 첫 키스 같은 느낌을 주진 못했어요. 누구도 그 허름한 아랍 소년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왠지 좀 다를 것 같아요.”

그렇게 그녀는 내게 제안을 하고 있었다. 키스를. 그리고 그 이후에 따라 나올 시간을. 나는 조금 속도를 조절하고 정리를 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나이와 직업에 대해,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으며, 솔직히 그쪽에게 끌려서 이 카페에까지 온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이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그런 이야기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녀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었을까. 그 날 이후 난 거의 매일같이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잠자리에서 지민은 대담했다. 몸에 흔적이 남는 것에 대한 내 두려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 손톱과 입술 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관계가 끝나면 늘 세계 각지의 사막을 거론하며 나와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사막의 밤하늘 아래에서 섹스를 하고 싶다고, 아침이 되면 함께 모래에 파묻혀 시체가 된 채로 유목민들에게 발견이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하루는 꿈 치곤 잔인한 것 아니냐는 내 코멘트에 지민은 이렇게 답했다.

“아이스크림 같이 달콤한 사랑, 휴일 유원지의 솜사탕만큼이나 핥아먹기 좋은 사랑은 싫어요. 삭막한 사막의 둔덕에서 차라리 쌉쌀한 모래가 뒤섞인 키스를 하는 편을 택하겠어요. 태양에 타버릴 걸 직감하면서도 황홀함을 감출 수 없는 그런 사랑. 잔인한 모래 전갈과 독뱀들만이 축복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요.”

사막을 주로 거론한 지민이지만, 그 자신은 정작 툰드라 동토와 같은 면도 있었던지라 세간의 일들에 대해선 무심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지 않았고, 별반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내 결혼생활이나 아내의 신상, 자녀 유무 등 불륜 상대가 궁금해 할 법한 것들에 대해서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또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략적인 직업의 종류, 대략적인 그녀의 몇몇 과거사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나를 내연남이 아니라 어떤 의례의 동반자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와 내게만 들리는 거대한 시계 종소리에 맞춰 키스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사막의 밤을 나누면서 입교하는 어떤 의례 말이다.

나는 몇 번인가 아내에게 출장을 간다는 핑계를 댄 뒤에 지민과 여행을 떠나곤 했다. 한 번은 군 입대 전에 친구들과 가봤던 기억을 살려 통영으로 갔다. 명승지를 꺼려하는 지민의 성향에 맞춰 우리는 어시장과 골목을 위주로 마치 탐사를 하듯 걸어 다녔다. 지민은 통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마치 외계인인 듯 바라보았다.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점, 작은 항구 도시에 산다는 점, 지척에 남국 분위기가 나는 여러 섬들을 둔 채 산다는 점을 제외하곤 서울 시민과 별 차이도 없었는데 말이다. 고등학생 때 유럽 여행까지 해본 것 치곤 좀 촌스러운 행동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항구 근처 둔덕에 위치한 산동네 비슷한 곳으로 발길이 닿게 되었다. 여느 산동네 혹은 달동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밀조밀 모인 집들이 하나 같이 알록달록한 색을 입고 있었다는 점이다. 해바라기 위에서 웃고 있는 태양의 모습, 바다를 덮고 있는 갈매기들, 심지어 UFO가 마을을 방문한 그림 등이 여기저기 벽과 전봇대와 대문들 마다 그려져 있었다.

마침 붓을 들고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무슨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설명이 따랐다. 지민은 대학교 때 미술 동아리에서 활동이 한 적이 있다며 자기가 직접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부탁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그 작업자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붓질을 하면서도 강렬하게 선을 구사하는 지민의 모습에 놀라기 시작했다. EQUATOR라고 제목이 붙은, 들판에 두 마리 도마뱀이 기어가는 그림이었다. 원근법으로 그려진 적도의 들판은 광막했고 어떤 포식자도 먹이도 안식처도 없어 보였다. 대신에 비처럼 내리는 햇살이 하늘과 들판을 거의 덮다시피 하고 있었다. 기원지도 목적지도 없이 방랑하는 두 마리 도마뱀을 햇살의 장막이 감싸고 있었다. 그렇다, 두 마리 파충류는 죽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오직 말라붙은 그것들의 가죽만이 잔혹하고 덧없었던 한 시대를 증언할 것이다. 그것이 지민의 그림이 내게 말했던 바, 아마도 지민 자신이 내게 말하고자 했던 것일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 항구로 내려온 우리는 벤치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한 손은 서로의 머리카락을 매만진 채, 다른 한 손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이 말했다.

“밤바다 위를 비행하는 조종사들이 가끔 바다와 하늘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 아세요? 그래서 드물긴 하지만 추락사고도 일어난대요. 어느 순간 하늘이 되어버린 바다로 침잠해가는 조종석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계기판은 점점 희미해져 빛을 잃고 공기 마찰음 대신에 물거품 소리가 동체를 감싸며, 상공의 저기압을 이겨내던 조종석 창이 이제는 수압과 싸우면서 금이 하나 둘 가기 시작하겠죠.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합동으로 마련해준 특이한 시간과 공간이 잠시나마 펼쳐지겠죠.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극소수 인간에게만 허용되는 절대 유폐의 순간이 될 거예요. 아마도 그땐 모든 종류의 공포가 가장 첨예한 형태로 엄습하겠죠. 질식, 익사, 수장(水葬), 심해의 어둠, 시체가 되어 영원히 해류 사이를 표류할 미래, 가족들의 곡소리조차 가로막을 두터운 바닷물에 대한 예감이 그를 공포로 얼어버리게 할 거예요.

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이 도래하는 절멸의 그 순간, 생의 온갖 사소한 꺼풀들이 완전히 걷혀지는 그 순간, 그는 어쩌면 지독히도 텅 비어 있는 진실을 발견할지 몰라요. 죽음 목전의 황폐한 시간조차도 차라리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진실을 말이죠. …… 언제부터인가 저는 그 절멸의 감성을 은밀하게 바랐어요. 누구도, 그 무엇도, 신조차도 접근할 수 없는 영혼의 엄폐물로 말이죠.”

지민은 말을 마치자 곧바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나에게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과 어깨와 죽음을 온전한 형태로 내맡긴 채.

그녀와 만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아내가 의심하는 낌새를 보였다. 그때서야 나는 지민과 아내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해야 될 시점임을 깨달았다. 내 욕망의 바다에서 아내는 지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내는 하나에서 열까지 범상함으로 무장을 한 밋밋한 여자였다. 그녀에게 여행이란 꼼꼼하게 책자에 나온 명승지를 둘러보는 행사이고, 사막이란 곧 자외선 집합소이자 숨 막히는 더위만을 상징했다. 사랑이란, 기념일엔 서로를, 명절엔 서로의 가족을 잘 챙겨주며, 꿀이 흐르는 시간을 빨아먹으며 사는 것을 의미했다. 지민을 만나기 전부터 나에게 아내는 의무감에 행하는 잠자리 파트너, 결혼이라는 착오 섞인 계약의 당사자, 비정한 세상으로부터 받는 충격을 줄여주는 쿠션의 역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기능주의 이론을 통해 가장 잘 설명될 성질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내와 이혼을 결심하는 것은 막상 쉽지가 않았다. 양심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단 불륜 상대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아내와 이혼한다는 스토리 자체가 어딘지 맘에 걸린 탓이 컸다. 그랬다. 이혼하겠노라고 내가 선언하는 직후부터 펼쳐질 스토리 어딘가에 막대한 제작비와 화려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 영화 시나리오 같은 것이 엿보였다.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보통 여자들과는 다르다, 그녀와 나의 사랑은 욕정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세간의 낡은 도덕률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되뇌며 나 자신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매번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도, 지민과 나의 관계에는 분명 거론하기 위험한 면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녀와 나의 비교(秘敎)적인 사랑이, 아내와의 이혼으로 인해 촉발될 현실의 방대한 쇄도 속에서 어떤 식으로 뒤틀리고 변질될지 알 수가 없었다. 사막을 거닐다 함께 목이 말라서 죽든가, 시베리아를 거닐다 함께 얼어 죽는 것 외에는 그녀와의 어떤 가능한 미래도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매혹적인 죽음의 이미지. 지민과의 미래에 대해선 그 이외엔 어떤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택시가 막 성수대교 근처를 지나 동부 간선도로 쪽으로 접어들고 있다. 병목 현상과 더불어 백미러 속으로 가로등이 들고 나가는 속도가 느려진다. 차창 밖으로 보이던 풍경도 달라져, 일렬로 늘어서 있던 아파트들은 드문드문해지는 대신에 주택과 빌라와 저층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하학적 미학의 영역에서 자신을 구현했던 도시의 야경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는 것이다.

바에서 나는 지민에게 모든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느 정도는 현실의 문법을 고려해 우리의 관계를 진전시킬지 말지를 결정해야 될 시점이라는 게 주된 취지였다. 지민은 몇 분 간 창문 너머 도로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생 드니의 그 공터를 다시 찾아간 적이 있어요. 취업을 하고 첫 여름 휴가였을 때죠. 처음 갔을 때로부터 한 10년 쯤 지났을 때였던 것 같네요. 재개발을 했는지 동네 자체도 많이 달라졌고, ‘이젠 달라진 생 드니를 만듭시다!’라는 표어가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어요. 물론 그 공터도 사라져 있었어요. 대신에 무슨 독립영화관 같은 게 들어서 있더군요. 전, 조금은 실망한 기분이 되어 영화나 보러가자는 심정으로 극장에 들어갔어요.

마침 상영하던 영화가 있었는데, 주인공이 까마귀인 영화였어요. 물론 까마귀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통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요. 주인공 까마귀의 관점에만 카메라 앵글은 고정이 되어 있었어요. 처음부터 화면이 굉장히 어지러웠어요. 까마귀가 먹이를 먹기 위해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이동하기 위해 날갯짓을 할 때마다, 주변을 보기 위해 머리를 홱홱 돌릴 때마다 화면은 심하게 흔들거렸어요. 게다가 그 까마귀가 내는 소리는 너무나도 리얼해서 거의 공포스럽기까지 했죠. 아시잖아요, 까마귀 울음소리가 얼마나 크고 불길한지.

프랑스에선 까마귀가 길조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더 이상은 그 화면과 음향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떴어요. 저 역시 현기증이 나서 오심이 일 정도였지만 영화를 끝까지 지켜봤죠. 거의 두 시간을요. 그런데 어떤 반전도 없이, 그냥 내내 그런 장면을 보여주고, 그런 소리를 들려주다가 까마귀가 거대한 화물 트럭에 압사를 당하면서 끝이 났어요. 함께 마지막까지 영화를 본 몇몇 사람들이 ‘엿 같은 영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극장을 나왔어요.

그런데 어땠는지 아세요? 극장 앞의 거리가 너무 뒤틀리고 흔들려 보이는 거였어요. 앞뒤에서 재잘거리는 인간들의 소음이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끔찍했어요. 마치 거대한 까마귀들이 먹이를 두고 싸우는 소리 같았어요. 귀를 틀어막는 정도가 아니라 청신경 다발까지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죠. 여기가 어딘가 싶었어요. 인간의 형상을 한 저 괴물들은 무슨 존재인가 싶었죠.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끝까지 영화를 본 사람들도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어요. 우리는 서로를 움켜쥐며 아무것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극장 앞에서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어요. 그제야 이질화된 우리의 감각은 정상으로 돌아왔죠.”

그녀다운 기괴한 서론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가만히 그녀와, 창밖의 야경과, 제이 앤 비 병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지민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한국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을 해본 뒤 깨달았어요. 그 아랍 소년과의 만남 이후로 제가 한 마리 까마귀처럼 살아왔다는 걸요. 아니 어쩌면 제 자신만 별개의 족속으로 까마귀들 사이에서 살아온 것일지도 모르죠. 누군가 제 영혼을 해부해보면 정말이지 사막과 생 드니와 낡은 철조망 편린 같은 것들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거예요. 그 외에는 아마도 공허, 까마귀의 검은 털들만큼이나 끝없는 공허뿐일 거예요.”

지민은 갑자기 위스키 잔을 통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한 잔, 두 잔, 세 잔... 순식간에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마셨다. 그리고 당황한 나를 앞에 두고 나직이 영어 가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지만, 막상 집중을 해보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다. 슬로우 잼 계통의 느리면서 애절함이 조금씩 분출되는 노래였다. In your arm I forget everything. Yes, everything. 지민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이 하나 둘 지민에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언제 그런 재능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민은 노래를 잘 불렀다. 그냥 음악을 좀 할 줄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음들 속에서 자기 내부의 어떤 것을 흔드는 법을 안다는 의미에 노래를 잘 불렀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그녀의 출현에 감탄한 눈치였다. 그랬다. 여기, 진한 위스키 냄새를 풍기며 온몸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를 사로잡는 여자가 있었다. 다들 한 번은 그녀의 미모를 보고 호감을 품을, 그러나 그녀 안의 삭막한 사막과 철조망과 아랍 소년과 얼굴 없는 까마귀를 알고 나면 몸서리를 칠, 그리고 나와의 불륜을 알면 저주를 할, 하지만 그녀의 노래를 한 번이라도 듣는다면 그 모든 것을 잊은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여인이 있었다.

Keep going, keep going please. Keep telling me, keep looking at me, keep hearing me. 노래가 절정을 향해 가면서 지민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녀와 계속 갈 수만 있다면, 팔과 팔이 서로 얽힌 채 밤의 종말을 영원히 유예하며 저 잔인한 꿈들을 계속 꿀 수만 있다면, 그 지하철, 그 카페, 그 밤바다, 그 야경이 계속 이어지기만 한다면, 신의 취향을 과감히 거슬러 우리의 이 현기증이 무한히 반복되기만 한다면, 그렇게 계속 된다면, 나는 아마도, 지민은 아마도, 이 세상은 아마도, 아마도 ...

keep going my darling, please. 마침내 지민이 노래를 마쳤다. 상기된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난 비틀거리는 지민을 부축하면서 안았다. 자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더욱 세게 지민을 껴안으면서 난 말했다. 미안하다고, 나를 용서해달라고, 이제 각자의 사막을 따로 품고 살 수밖에 없다고.

이윽고 택시는 동부간선에서 시내로 진입한다. 집까지는 5분 거리였다. 속도는 확연히 느려졌다. 불이 켜진 편의점과 생맥주 집이 눈에 들어오고, 한적한 도보를 걷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익숙한 거리의 풍경이고 동네의 정경이다. 핸드폰 화면이 밝아진다. 집에 거의 다 왔냐며, 어디냐며 묻는 아내로부터의 문자다. 나,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또 지민은 어디에 있을까? 그랬다, 난 지금까지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다. 혹시 그 아파트, 강변을 가로질러 저편에 늘어서 있던 아파트들의 불 켜진 창들 중 한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도시 야경의 절정을 구현했던 그 불빛들 중 한 곳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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