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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간호 역사여행 ⑨ 첫 한국인 졸업간호원 김마르다, 1908
한국 간호계의 겨자씨이며 여성운동의 선구자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12-12-18 오후 05:21:03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 제1회 졸업생

◇전통적 구습의 성벽 부수고 사회로 나오다

 김마르다(金瑪多) 부인은 보구여관에서 일하기 전에 서울에 살았는데, 의처증이 있고 질투심이 많은 남편이 집밖으로 나가거나 외간 남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오른손 손가락들과 콧등을 절단해서 불구가 되었다.

고대의 다섯 가지 형벌인 묵형(얼굴에 먹칠), 위형, 월형, 궁형(거세), 대벽(사형) 가운데, 코를 베는 위형과 손을 베는 월형을 직접 가한 것이다. 더욱이 남편은 두 아이를 데리고 몰래 사라졌다. 19세기 말 남녀 불평등이나 가정폭력이 그 정도로 심했다. 그녀는 집 안에 숨어 살아야 했고 아이들을 보지 못해 눈물로 지냈다. 장애자라 하녀로 받아 주는 데도 없었다. 갑오년(1894) 동학 난리에 이어 청일전쟁이 일어나 삶은 더욱 고단해졌다.

 그러나 살 길이 열렸다. 그는 보구여관에서 메리 커틀러 의사의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사정을 들은 의사의 배려로 병원에서 요리, 빨래, 청소 일을 하게 되어 병원에서 숙식하게 되었다. 신실하게 일하는 것을 지켜보던 커틀러는 곧 그에게 간호보조 일을 하게 했다. 그는 병원에서 환자를 간호하며 전도하던 황(黃袂禮) 전도부인으로부터 기초적인 간호 일과 한글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또한 황 부인과 커틀러 의사로부터 기독교 복음을 배우고 병원 바로 옆에 있던 정동제일감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한글 공부와 성경 공부는 그의 지적, 영적 능력을 깨우쳤다. 그는 1896년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마르다'(Martha 瑪多)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모든 일을 부지런히 솜씨 있게 잘했기 때문에 받은 이름이었다. 또한 두 명의 `마리아'(Mary Cutler, Mary Hwang)와 함께 지내고 있었기에 `마르다'가 적절했다. 당시 대부분의 여자는 자신의 정식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때 이름도 함께 받았다. 그것은 이름 없는 여인이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사건이었다.

 1897년 김마르다 부인은 황 부인과 함께 아침마다 환자들에게 성경과 기도를 가르치고 대화하며 기독교를 전했다. 방문객들과도 대화하며 전도했다. 또한 다른 간호보조들에게 한글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1898년에는 낮에는 요리와 빨래 등 병원의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밤에는 환자를 돌보는 입원병동의 간병인 일을 했다.

김 부인은 점차 한국인 간호보조들을 감독하고 돌보는 사감 역할을 감당했다. 1901년 전후에는 보구여관의 전도부인으로 사역했다. 그의 지도력과 지적 능력은 1903년부터 1년간 동대문교회에 여학교를 개설하고 그 책임을 맡은 데서 드러난다. 정동과 상동에 이어 동대문에도 소녀들을 위한 첫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김 부인은 교사로 활동했다.

 1903년 12월 김 부인은 에드먼즈 선교사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를 개설하자 이그레이스와 함께 첫 학생으로 입학했다. 3년간 병원에서 일하며 공부한 후 1906년 1월 25일 한국 최초의 간호원 예모식에서 그레이스와 함께 간호모를 썼다. 마침내 1908년 11월 5일 두 사람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김마르다 부인은 사진에서 보듯이 흰색 간호복을 입고 졸업장을 받은 첫 졸업간호원(등록간호원)이 되었다. 조정환은 「조선간호사」(1933)에서 이 첫 간호원 배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이 한 적은 수이었지만 장래에 그들의 다수 자매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 봉사의 새 영역에 투신할 것에 대한 예고로 보아서 의의심장하였다. 조선 간호부 선발대가 수 천 년 전통적 구습의 강한 성벽을 용감히 쳐부수고 사회로 뛰쳐나와 봉사의 입장뿐만 아니라 근대 여성운동의 견지로도 매우 중요한 새 직업에 헌신한 그 점에 대하여 우리는 그들에게 흠앙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졸업 후 김 부인은 보구여관에서 수간호원으로 근무했다. 1909년에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에서 일반 간호학을 강의했다. 1911년에는 초급 해부학과 생리학을 강의했다. 1913년 가을까지 동대문 해리스병원에서 부간호원장으로 근무했다.

 1912년 서울의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가 평양부인병원인 광혜여원으로 임시로 이전하자, 김 부인도 1913년 말 평양 광혜여원으로 옮겨가 수간호원으로 입원실을 책임지면서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평양으로 옮겨갈 때 가난한 어린 소년을 입양해서 함께 살았으며, 커틀러 의사와 홀 의사와 함께 광혜여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920년 평양에서 일할 때 방문한 스승 에드먼즈 해리슨 부인을 만나기도 했다. 해리슨 부인은 1928년에 쓴 「한국 개척기에 뿌린 겨자씨」라는 소책자에서 김마르다에 대해서 “이후 그녀는 궁핍한 한국인 어린이 두 명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봉사하도록 가르치고 교육시켰다”고 서술했다. 예전에 잃어버린 두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입양한 두 아이를 양육하며 말년을 보냈다. 김마르다 여사는 한국 간호계의 겨자씨였고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다.

글·사진 : 옥성득 교수

 ※ 이 글에서는 간호사 명칭을 근대에서 활동했던 당시 그들을 부르던 간호원으로 통일해 서술했다.

 ※ 다음 원고 `⑩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학교 1회 졸업생 김배세'는 1월 24일 간호사신문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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