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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간호 역사여행 ⑧ 첫 한국인 졸업간호원 이그레이스, 1908년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12-11-27 오후 12:40:10


글·사진 : 옥성득 미국 UCLA 한국기독교 부교수(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석좌)

◇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 1회 졸업생

◇ 가부장제 굴레 벗어나 당당하게 일과 결혼 선택

◇ 손재주 좋고 물품관리 뛰어나 주위에서 감탄

 이그레이스(李具禮, 1882∼미상)는 1908년 서울의 감리교 여자병원인 보구여관의 간호원양성학교를 김마르다와 함께 제1회로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졸업간호원(현재의 등록간호사)이 되었다.

 그레이스는 1882년 9월 9일 서울에서 여종으로 태어났고, 이름은 `복업'이었다. 어릴 때 괴사(壞死)병에 걸려 다리 불구가 되었는데, 보구여관에 와서 여러 해 동안 홀(Rosetta S. Hall) 의사의 괴상당한 뼈 제거 수술에 이어 커틀러(Mary M. Cutler) 의사의 치료를 받아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여 제대로 걷게 되었다. 병원 조수로 간호 일과 환자 대상 전도를 하던 황메리(黃袂禮, 1872∼1933) 부인과 커틀러 의사로부터 기독교를 배워 1897년 정동제일교회에서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명 `그레이스'를 받았다.

 또한 1897년 건강이 악화된 황메리로부터 기초적인 간호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유능한 조수가 되기 위해서 진료소에서 오후에 일하면서 오전에는 이화학당에 다니면서 기초 과목과 영어를 배웠다. 그래서 간호원양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훌륭한 조수로 활동했다.

 1903년 12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가 개교하자 그레이스는 첫 학생이 되었다. 병동관리자로 병원 시트를 만들고 재봉틀 사용법을 익혀 병원 물품을 만들었는데, 손재주가 좋아 삼베용 바늘이나 붕대를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꼼꼼하게 잘 다루었다. 가난한 출신이라 소량의 물건을 활용하는 데 천재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 결과 1906년 1월 25일 김마르다와 함께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간호원 예모를 받는 제1회 예모식(가관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수원 삼일중고등학교의 설립자인 감리교의 이하영(李夏榮, 1870∼1852) 전도사는 커틀러 의사와 에드먼즈 간호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 후에도 학업과 간호원 근무를 약속하면서 그레이스에게 공개 구혼했고, 그녀는 이 제안을 4개월 간 심사숙고한 후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1907년 1월 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회 예모식 때 그레이스는 간호복을 예복으로 입고 서양식으로 결혼했다. 이런 새로운 청혼 과정과 혼인 방식은 여성과 간호원의 지위 향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독교적 결혼의 한 예가 되었다.

 마침내 그레이스는 1908년 11월 5일 김마르다와 함께 간호원양성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최초의 한국인 졸업간호원으로서 보구여관에서 근무했다.

 1910년 남편이 평양 이문골교회에 임명되자 평양 광혜여원으로 옮겨 홀 의사와 커틀러 의사를 도와 5년간 간호원으로 근무했다. 그레이스는 수간호원으로 봉사했고, 의사들의 통역도 맡았으며, 수술 시 마취를 담당했다. 1913년 말 김마르다 간호원이 광혜여원의 수간호원 겸 병동담당 간호원으로 임명되자, 그레이스는 홀 의사의 조수 겸 왕진담당간호원이 되었다. 그레이스는 전 병원 조수였던 박수산노와 함께 평양자혜병원에서 산파 과목을 이수했다. 그 결과 1914년 총독부에서 새로운 의료규칙을 발표하자, 그녀는 1914년 5월 27일 의생(醫生) 면허(2905번)를 획득했다. 이로써 그녀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 정부의 면허장을 가진 의료인의 명예를 얻었다. 이후 그레이스는 의생(의사)으로 활동했다.

 1914년 가을 이하영 목사가 서울 동대문교회에 임명되자, 그레이스는 서울로 다시 이사를 와서 이후 3년간 개인 병원을 운영한 듯하다. 1917년 이하영 목사가 진남포교회로 임명되었는데, 1919년 삼일운동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자, 그레이스는 평양으로 이사해서 남편 수감 기간에 고난을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콩밥을 지어 자녀들과 함께 먹었다. 1920년 9월에는 평양을 방문한 마가레트 에드먼즈 해리슨 부인을 만나는 기쁨도 맛보았다.

 그러나 출옥한 남편은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목회활동이 어려웠다. 1923년 강릉교회에 임명되어 4년간 시무한 후 휴직하다가 1931년에 스스로 은퇴했다. 이그레이스는 강릉에서 개업했는데, 1924년 6월부터 1925년 5월까지 1년간 200명의 여자와 어린이를 치료하고 4명의 산부를 조산했다.

 이그레이스는 남편과 자녀(전처 1남과 3남 2녀)와 함께 수원으로 돌아와서 거북산 밑에서 산파소를 경영하며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 경제를 꾸려나갔다. 남편 이하영 목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 83세로 사망했다. 이그레이스의 말년과 사망 시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여종으로 태어나 불구의 몸으로 버림받았지만 한국 최초의 간호원이 되어 고난에 찬 한국 근대역사의 험난한 길을 인내하며 산 이그레이스! 그 삶은 운명과 `업'으로 산 삶이 아니라 선택과 `은혜'로 산 삶이었다.

 ※ 이 글에서는 간호사 명칭을 근대에서 활동했던 당시 그들을 부르던 간호원으로 통일해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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