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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간호사 33인 발굴
만세운동 - 군자금 모집 - 사회계몽 등 맹활약
[편집국] 정규숙기자   kschung@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09-09-23 오전 10:20:11


◇ 간협, 독립운동 간호사 의로운 삶 기리는 데 주력

 독립운동을 한 민족의 간호사 33인의 명단과 주요 행적이 밝혀졌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의로운 삶을 살다 간 간호사들은 김려화 씨의 간호학 석사학위논문을 통해 공개됐다. 논문에서 1914년부터 1944년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진 간호사는 23명으로 다음과 같다.

 △김오선 △김응숙 △김태복 △김효순 △노순경 △박덕혜 △박옥신 △박원경 △박인덕 △박자혜 △박혜경 △윤진수 △이도신 △이성숙 △이성완 △이아주 △이정숙 △임수명 △조명숙 △정종명 △탁명숙 △채계복 △한신광.

 여기에다 논문 발표 이후 김려화 씨가 추가 발굴한 10명을 합해 독립운동을 한 간호사는 모두 33명으로 늘어났다. △김순호 △김안순 △김여운 △김은도 △김화순 △박봉남 △장옥순 △장윤희 △최승원 △함귀말.

 독립운동을 한 간호사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김려화 씨는 중국 동포다. 그는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시기별, 지역별, 유형별로 분석해 정리한 `일제강점기 여성 간호인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로 간호학 석사학위(이화여대)를 받았고, 현재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논문에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간호사들의 활동 유형을 독립만세운동, 군자금 모집, 적십자 활동, 사회운동(노동·여성·농촌운동), 첩보활동, 비밀연락, 독립군 규합 등으로 나눠 제시했다. 〈표 참조〉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1914년 임수명 간호사가 해외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투사인 남편 신팔균의 비밀연락을 도우면서부터 시작됐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간호사들은 독립만세운동에 대거 동참했으며,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배포하고, 항일구국을 내용으로 연설을 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3·1운동 이후 보다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정숙 간호사는 최초의 여성독립운동단체인 `혈성단'을 조직했다. 간호사들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혈성단의 새 이름), 적십자사 등에 소속돼 활동하면서 여성지도층으로 자리매김했다. 독립운동 중에 체포된 간호사들은 취조를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간호사들은 군자금 모집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군자금은 독립투사들의 활동비와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독립운동을 지속시킨 혈맥이었다. 간호사들은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경비를 마련했고, 매달 의연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했으며, 자본가들을 설득해 기부금을 내게 만들었다.

 적십자 활동을 통해 상병자 구호를 위한 간호인력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사회를 개혁하고 대중을 계몽하기 위한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독립인사들의 비밀접촉을 도와주고, 독립군을 규합하고, 일제의 비밀정보와 군의 형세를 수집하는 첩보활동을 전개했다.

 김려화 씨는 “간호사들은 일제강점기라는 국가 위기상황에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전문직 신여성으로서, 사회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했다”면서 “만세운동에서부터 군자금 모집, 사회운동, 비밀연락에 이르기까지 간호사들의 활동분야는 매우 다양했다”고 설명했다.

 대한간호협회는 대한민국을 간호한 독립운동가 간호사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애국정신과 의로운 삶을 기리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간호협회는 박자혜 간호사가 올해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지난 7월 15일 추모행사를 열었다. 박자혜 선생은 단재 신채호 선생과 결혼해 아내이자 동지로 독립운동을 함께 했다.

 독립운동 간호사들을 조명하는 미디어의 관심도 뜨겁다. MBC 텔레비전은 광복절 특집으로 다큐멘터리 `독립운동, 그 절반의 이름 - 간호사 박자혜' 편을 지난 8월 11일 방송했다. 박자혜 선생의 삶은 우리 역사가 잊고 있었던 절반의 독립운동, 여성의 독립운동사가 가진 가치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8월 13일자 신문에 김려화 씨가 논문을 통해 밝힌 독립운동 간호사들에 대해 2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 박자혜 선생

-`간우회' 지도자로 만세운동 주동
-신채호 선생과 결혼해 함께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박자혜 간호사는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고양군(현 서울 수유리)에서 태어났다. 1914년 숙명여학교 기예과(2회)를 마치고,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간호부과 및 조산부과(서울대 간호대학 전신)를 각각 1916년 및 1917년에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의원에서 근무하면서, 간호사와 조산사들을 규합해 간우회를 조직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와도 연락하고 있었다. 박자혜 선생이 주동이 돼 만세운동에 동참한 쾌거가 세칭 `간우회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경의 혹독한 취조를 받았으며, 유치장에서 풀려난 후 만주로 건너갔다.
 혁명가의 피가 끓는 여걸 박자혜 선생은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운명적으로 결혼해 아내이자 동지로서 독립운동을 함께 했다. 둘째를 임신한 선생은 큰 아들 수범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인사동 69번지에서 `산파 박자혜' 간판을 내걸었다. 하지만 일경의 감시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고, 거의 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다 단재 선생 옥바라지까지 해야 했다.
 선생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독립투사들을 안내하고 연락을 취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 파괴 임무를 띠고 잠입한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를 도왔다.
 선생은 1943년 10월 16일 사망했으며, 화장한 뒤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박자혜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2008년 충북 청원군 단재 선생의 묘소에 박자혜 선생의 위패를 함께 안치함으로써 부부는 합장됐다. 유족으로 며느리(장남 수범의 부인) 이덕남 씨가 생존해 있다.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호적 등재를 거부해 무국적자로 남아 있던 단재 선생에게 2009년 4월 가족관계등록부를 수여했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박자혜 선생을 2009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이정숙 선생

- 여성독립운동단체 `혈성단' 조직
- 수감된 애국지사와 가족 돕는 데 앞장

 독립운동가 이정숙 간호사는 최초의 여성독립운동단체 혈성단을 조직한 주인공이다.
 이정숙 선생은 189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3·1운동 직후 동창인 오현주(교사), 장선희와 함께 수감된 애국지사와 그 가족을 돕기 위한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을 이성완 간호사가 `혈성단'으로 명명하고 발전시켰다.
 혈성단은 애국 동지들을 규합해 독립자금을 모으는 데 주력했다. 이후 혈성단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와 통합돼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정숙 선생은 애국부인회 경성지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맹활약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한적십자사를 조직하고 경성지부를 설립하자, 애국부인회가 주축이 돼 경성지부를 꾸렸다. 회원의 대부분이 간호사와 교사였다. 일본고등경찰이 요시찰한 적십자사 인물 중 이정숙 선생을 비롯해 박옥신, 박인덕, 윤진수 등 간호사가 4명 포함돼 있었다.
 이정숙 선생은 1919년 11월 애국부인회 회원 일제 검거령 때 체포됐다. 3주간 고문을 당했으며,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정숙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이성완 선생

- `혈성단' 통해 조직적인 독립운동
- 동생 이성숙 간호사도 만세운동 참여

 독립운동가 이성완 간호사는 최초의 여성독립운동단체인 `혈성단'을 통해 활동한 인물이다.
 이성완 선생은 1897년 12월 10일 함경남도 정평군 풍흥리에서 태어났다. 정신여학교 재학 중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과 함께 기거하며 애국독립정신이 고취됐다.
 졸업을 며칠 앞둔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를 받아다 기숙생들에게 전했다. 학교 3층 홀에 기숙생들을 모이게 한 후 조국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연설했다.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이성완 선생은 3·1운동 이후 혈성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앞서 세브란스병원 이정숙 간호사 등이 중심이 돼 애국지사들을 옥바라지하기 위해 만들었던 조직을 이성완 선생이 `혈성단'으로 정식 명칭을 붙이고 활성화시켰다.
 이후 혈성단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명칭을 바꾸고 지부 확장에 전력투구했다. 주요임무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전국적인 조직으로 거듭나면서 독립전쟁 준비에 힘을 쏟았다.
 이성완 선생은 애국부인회 활동을 하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으며, 회원 남편의 밀고로 대구 감옥에도 수감됐다. 출감 후에는 국민계몽 웅변대회를 열어 주민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광복 후에는 박순천, 황신덕 등과 같이 대한여자부인회를 발기해 애국운동에 힘썼다.
 이성완 선생은 독립운동가 차 광 선생과 결혼했다. 차 광 선생은 1919년 3·1운동 때 원산에서 봉기해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애국자다. 광복 후 숭실대 화공과 교수를 지냈다. 이성완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한편 이성완 선생의 동생 이성숙 간호사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성숙 선생은 1919년 3월 5일 학생만세 봉기 때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있으면서 동료 간호사들을 독려해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 한신광 선생

- 태극기 나눠주며 만세운동 동참
- 항일여성단체 활동하며 사회운동 펼쳐

 독립운동가 한신광 간호사는 1920~1970년대 활동한 사회운동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진주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으며, 광주학생봉기 때 서울의 학생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경성 태화여자관에서 시작된 모자보건사업을 지도했다.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를 통해 여성운동을 펼쳤다.
 한신광 선생은 1902년 7월 23일 경남 진주시 평안동에서 태어났다. 1917년 진주 광림여학교 고등과를 마쳤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애국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던 오빠 한규상(의사)과 올케 박덕실을 도와 진주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이 사건으로 2개월 동안 진주경찰에 구금됐다 풀려났다.
 1923년 동대문부인병원 간호부양성소(이대 간호과학대학 전신)를 졸업했으며, 산파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선생은 태화여자관 태화진찰소 사회봉사부회 일원으로 모자보건사업에 투신했다. 가정방문을 통해 임산부와 어린아이를 위한 건강교육을 실시했다.
 천용권 씨와 결혼 후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지만 2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일하며 민족주의적 여성운동에 가담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서울에서 학생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지목돼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근우회 소멸과 함께 1930년 마산으로 내려가 조산원을 개업했다. 해방 이후에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마산시 부녀계장, 마산부인회 회장 등 여성운동가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부녀사업과장으로 있으면서 피난민 수용소의 어린이와 부녀자를 모아서 모자원을 설립했다. 이후 서울에서 조산원을 개업하고 1970년경까지 조산사로 활동했다. 대한조산협회장을 지냈다. 대한간호협회 보건간호사업 공로표창장, 삼일동지회 태극반지를 받았다.



◆ 박원경 선생

- 독립만세운동 참가 옥고 치러
- 부친의 전 재산 독립자금으로 보내

 독립운동가 박원경 간호사는 1919년 3월 황해도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박원경 선생은 1901년 8월 19일 황해도 백령도에서 태어났다. 1926년 일본 히로시마 여학교 고등부를 마치고 농촌계몽운동을 펼친 신여성이다. 서울 동대문부인병원 간호부양성소(이대 간호과학대학 전신)를 1929년 수료했다. 이대 동대문병원 간호부장을 13년간 지냈다.
 박원경 선생은 여섯 살 때 독립운동가 김태연 목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다. 1919년 3월 2일 김태연 목사로부터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으며 만세운동 동참 지시를 받았다.
 이어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해창리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해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징역을 선고받고, 황해도 해주 감옥 독방에 수감됐다. 출감 후에도 요시찰 인명부에 올라 일경의 계속적인 감시와 미행을 당했다.
 방신영, 홍에스더, 김필례, 김활란 등과 함께 YMCA를 조직하고 초대임원(재정위원)으로 1922년 취임했다. 이때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박용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부친의 전 재산을 임시정부 독립자금으로 보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해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조직했으며 총무로 취임했다. 서울 동대문감리교회 원로장로로 추대됐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양아들인 박길준 연세대 석좌교수(법과대학장 역임)와 함께 살았다. 박원경 선생이 강원도 양양군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할 때 홍역으로 사경을 헤매던 어린 길준을 서울로 데려가 치료받게 한 것이 인연이 됐다.
 1983년 8월 5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경기도 금촌 기독교상조회 공원묘지에 안치됐다.
 박원경 선생에게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2009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으로 이장될 예정이다.


◆ 임수명 선생

- 비밀문서 연락·군자금 모금에 헌신
- 독립운동가 신팔균 선생과 결혼

 독립운동가 임수명 간호사는 항일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신팔균의 부인으로 애국운동에 몸 바친 인물이다.
 김려화 씨의 논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간호사 중에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 임수명 선생이다.
 임수명 선생은 1894년 2월 15일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1912년 서울 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 환자로 위장해 입원한 독립운동가 신팔균 선생과 알게 돼 1914년 결혼했다.
 결혼 후 북경으로 망명한 신팔균 선생의 비밀문서 연락, 군자금 모금, 독립군 후원 등에 힘썼다. 신팔균 선생이 항일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으로 항일전쟁을 수행할 때도 같이 활약했다.
 1921년 밀명을 띠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신팔균 선생이 1924년 2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대원들이 만삭의 몸인 임수명 선생을 서울로 돌려보냈다.
 귀국해 남편이 전사했다는 흉보를 접하고, 둘째 아들마저 병으로 잃게 되자 딸과 함께 1924년 11월 2일 사직동 자택에서 자결했다.
 임수명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정규숙·이유정·김보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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