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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편집부   news@nursenews.co.kr     기사입력 2002-01-17 오전 11:25:59

데생을 배우고 싶다. 늦봄에 산 조그만 화분 안의 애기별꽃.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죽일 뻔했다가 마당에 심어 놓고 구멍 송송난 바구니를 요람처럼 씌워 놓았더니 대견스럽게도 말갛고 하얀 별꽃을 매일 피워준다.
　
오늘 아침도 바구니를 살짝 들춰보니 이슬같이 핀 꽃들이 어찌 그리 영롱한지 썩 반듯한 놈으로 골라 따서 책갈피에 간직하고 싶어졌다.

　이 아침에 떨어진 보석을 줍고 있다. 아무도 허락하지 않은 이 욕심을 누군가 혼쭐낼 것만 같아 얼른 안으로 도망쳤다. 물이 끓으면 하모니카소리 나는 주전자를 가스불에 올려두었다.

　턱 괴고 가만히 애기별꽃을 보고 있자니 이 순백의 꽃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까운 생각이 든다. 연필로 잘 그려 놓을 수만 있다면, 그런 재주만 있다면…, 그림 그리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작은 새 한 마리 앉았다 떠난 가지의 여운같이 남겨진 기억, 지금도 설레임을 준다. 머쓱하게 큰 파스텔 그림동화책과 32색 파스텔 세트, 그리고 오래된 도화지 뭉치. 이것이 흔적들이다.

　요즘은 데생에 눈길이 간다. 소녀의 마음이 돼 깡총발로 안을 둘러보는 ○○ 초상화 학원. 섬세하게 완성된 데생은 의미있는 어떤 걸 더욱 귀하게 만드는 작업처럼 보인다. 용기차게 밀고 들어갔지만 위축된 마음에 황급히 되돌아 나온 적도 있다. 그래도 지날 때 여전히 기웃거리는 미술학원. 어째서 지금까지 버리지 않는 건지.

　순진하기만 한 작은아이의 눈. 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미리 결정내린걸까? 의지하고 싶지만 당신네 몫마저 벅차 보였고, 힘겹지만 살아있음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주며 사는 부모님 모습이 애처로웠나보다. 짐을 지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대체로 철없을 정도로 계절 따라 변하는 자연을 천진난만하게 뒹굴었지만, 가령 노란 긴머리인형을 갖고 싶다거나 다른 누군가에게라도 소중하다는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다양한 사치성 욕구들이 생길땐 차츰 이를 부끄럽게 여겨 절제하는 습관에 길들여 갔다. 덕분에 난 요구가 극히 적은 아이가 되었다.

　그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림 그리는데 돈 많이 든다는 언니의 말에 안타깝다는 느낌마저 죄스러워, 작게 핀 꽃을 들킬까 쬐그만 가슴으로 잡초마냥 뽑아내 버렸다. 나 조차도 잡초처럼 취급한 이런저런 야생화 같은 꿈. 후엔 역으로 불만이 되어 여러가지 방법으로 투사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리.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행동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부모님과 맞대결할 나이쯤 되서야 비로소 부모님이 날 돌봐야 할 의무를 지닌 사람이 아닌 인생의 선배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학 1∼2학년쯤 되나? 외지에 혼자 오래 나와 살던 나는 지친 철새가 둥지를 찾아 날아드는 것처럼 그날도 오랜만에 집으로 떠난 여행, 아니 그보다 휴식을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두 분의 냉전을 지켜봐야 했다. 끝도 모를 사막을 빠져나가려고 애쓰다 모래바람 불어닥치면 이런 기분일까?

　난 가능한 잔인해지고 싶었다. 쉴 곳이 필요해서 죽음을 선택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분에게 난 비상구 같은 존재. 미소가 소박한 분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나에게조차 무관심하고 싶은데.

　작은 방으로 피했다. 중학교때까지 생활하던 공간. 그땐 고등학생이 되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힘없이 벽에 기대앉았다. 왜였을까? 무심히 바라본 책장 안에 심하게 낡은 앨범. 두 분이 사모관대 쓰고 전통혼례하는 사진이 나왔다. 엄마가 가마 타고 시집올 때 산고개 넘다 멀미가 심해 가마꾼까지 고생했다던 그때.
　`피식'
　눈길이 떠나질 않는다. 꽃같이 아름답고 젊은 순간에 시간을 고정시킨 사진. 할머니가 가끔 귀띔해주시던 두 분의 젊은 시절과 나의 젊음. 나처럼 꿈이 있었으리, 낭만과 기대도.

　그러나 성장하며 본 건 부모님의 좌절된 모습과 분노, 한숨. 내게 많은 것들을 충족시켜주지 못했고, 무엇 때문에 힘들고 아팠는지 알 여유도 없이 사신 부모님. 이해보다 원망을 품었다.

　몰랐을까?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딸의 모습을…. 그러나 가엾게도 항상 날 믿음으로 대했다. 지금도 철없이 둘러대기 잘하는 딸을 애정어린 눈빛으로 대한다. 녹슨 마음 문에 기름칠해지고 `끼이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설령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신다해도 있는 모습 그대로의 두 분을 받아들여야겠다.

　나 자신과의 싸움 중 이 한가지는 아주 싱겁고 밋밋하게 항복으로 끝났다. 오히려 편안한 눈물이 흘렀다. 특별한 관심사가 있다. 과연 그분들의 행복은 뭘까? 하는….

　가끔 엄마가 이런 전화를 하신다. 대뜸 한단 소리가 “야, 니 시집만 가면 아무 걱정 없다” 놀랄 것도 없는 레파토리. 우리 5남매 시집·장가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