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 대한간호협회 서울연수원에서 열린 히라하라 유미(Ayaka Hirahara) 일본방문간호재단 상무이사의 강연은 한국의 간호계와 지역 돌봄 정책 관계자들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일본은 이미 인구의 3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특히 85세 이상 인구의 급증, 독거·노인 부부 세대 확대는 의료의 ‘병원 중심’ 구조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본이 50년 이상 준비해 온 지역포괄케어(Community-based Integrated Care)는 “환자가 병원이 아닌 집과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의료·요양·생활지원·예방을 시정촌 단위에서 통합하는 구조이며, 그 한 가운데에 방문간호가 있다.
“지역포괄케어의 핵심은 병원이 아니라 간호입니다. 간호사가 24시간 365일 지역의 안전망을 책임져야 고령자가 집에서 살 수 있다.”
일본 방문간호의 역사는 짧지 않다. 1970년대 지역 보건사의 가정방문에서 시작해 1992년 방문간호 육성 사업을 거쳐, 2000년 개호보험 도입 이후 본격적으로 체계화됐다.
핵심은 의료적 중증도가 높을 때 방문간호 제공하는 의료보험과 일상생활 지원, 자립 지원 중심의 방문간호 제공하는 개호보험의 이원적 서비스 체계다.
하나의 방문간호 스테이션이 두 제도를 모두 운영하며, 이용자는 자신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제도를 선택한다. 간호사는 24시간 대기 체제로 운영되며, 의사·재활치료사와 함께 다직종 팀을 이룬다. 운영 주체는 영리·의료법인·사회복지법인 등 다양하며, 지역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확장된다.
특히 최근 일본에서는 방문간호의 대상이 고령자에서 소아·중증 장애아·정신질환자 등 전 세대로 늘어나고 있다. 이는 병원 중심 관리에서 지역사회 중심 관리로의 국가적 전환을 의미한다.
히라하라 상무이사는 일본 방문간호의 발전 과정이 단순히 예산 증가나 정책 개편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방문간호의 가장 큰 어려움인 인력 양성과 유지를 위해 경력 사다리 구축, 의료 취약지역 접근성 강화, 다직종 상호 연수 프로그램, 그리고 ICT 기반 업무 효율화를 추진했으며, 이는 지역 내 다직종 간의 협력이 필수적임을 강조한 사례다.
그는 “방문간호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지역의 다직종이 서로 알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일본의 대표적 방문간호 기관인 아스카야마 방문간호 스테이션의 사례였다.
이곳은 25년간 다직종 회의를 지속하며 병원과 지역이 벽을 허물고 협력하는 모델을 구축했다.
병원 간호사들이 지역 스테이션에서 직접 방문간호를 동행하며, 서로의 관점과 역할을 이해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암환자 재택 통증 관리, 난치성 욕창 치료, 아동학대 대응 등에서 큰 성과가 나타났다.
연하장애(嚥下障害·Dysphagia) 환자를 위해 방문간호 스테이션 간호사와 영양사, 지역 레스토랑 10곳이 협력해 ‘형태식’을 메뉴로 개발했다. 외식을 포기해야 했던 장애 아동과 가족에게 새로운 삶의 경험을 선물한 것이다.
주민 교류 공간 ‘단단(だんだん)’ 카페에서는 장애인 가족과 주민이 자연스럽게 섞여 대화하고, 축제·전시회·유튜브 활동을 함께 하며 지역사회가 스스로 돕는 공조 시스템을 만들었다.
뇌경색 환자의 기적 같이 회복한 사례에서도 방문간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설명해 준다.
퇴원 직후 의욕을 잃고 거동이 어려웠던 한 80대 환자는 방문간호팀의 집중관리와 발 마사지, 그리고 ‘족적 사진’으로 개선을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신체적·정신적 회복을 동시에 이뤘다.
한 달 뒤 그는 “장어가 먹고 싶다”고 말하며 스스로 걸어 일어섰다.
히라하라 상무이사는 “간호는 환자의 몸만 돌보는 것이 아니다”면서 “그들의 ‘살고 싶은 마음’을 다시 깨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이팅게일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간호사의 역할을 △생명력 소모를 최소화하는 환경을 만드는 일 △환자의 작은 소망을 회복의 동력으로 만드는 일 △지역사회 전체의 건강을 증진하는 실천이라고 규정한다.
WHO가 말하는 전인적 웰빙(신체·정신·사회적 안녕)을 위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람을 지키는 직업이 바로 간호사라는 것이다.
히라하라 상무이사는 “지역의 웰빙은 간호사가 만든다. 방문간호가 가능해야 고령자는 병원 아닌 집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방문간호 발전사는 단순한 제도 설명을 넘어 한국이 직면한 △단독·노인 부부 세대의 폭발적 증가 △85세 이상 초고령층의 확대 △병원 중심 의료의 한계 △지역 돌봄 인프라의 불균형이라는 현실과 닮아 있다.
특히, 한국도 간호법 시행으로 지역 기반 돌봄의 체계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간호사의 역할 설정, 교육·자격 체계 정비, 다직종 연계 시스템, 방문간호 인프라 확대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하다.
히라하라 상무이사의 강연은 한국에 분명한 교훈을 제공한다.
“방문간호는 정책이 아니라 문화이며, 지역을 지탱하는 생태계다. 간호사를 중심으로 한 다직종 연계 없이는 지역 돌봄은 절대 작동하지 않는다.”
일본 50년의 방문간호 역사는 한국이 앞으로 맞닥뜨릴 초고령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 전략서와 같다. 그 핵심은 병원이 아니라 지역, 그리고 그 현장을 지키는 간호사다.
히라하라 상무이사의 메시지는 “간호사는 사람을 살리고, 사람은 지역을 살린다”로 요약된다. 이 메시지를 어떻게 한국의 상황에 맞게 실천할지가 한국의 간호·요양·돌봄 통합체계를 완성하는 데 있어 향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