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의료 현실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만성질환과 돌봄 수요는 늘어나지만, 지역 의료 인프라는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버스가 하루 몇 차례뿐인 시골 마을에서 주민들이 병원을 가려면 하루를 통째로 써야 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의료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같은 의료 공백을 최소화해 온 곳이 바로 보건진료소다. 45년째 농어촌 곳곳에서 기초의료와 예방 서비스를 제공해 온 보건진료소는 사실상 지역 주민의 ‘생명선’이다. 그러나 현행 제도는 이들을 의사가 없는 지역을 ‘보완’하는 시설로만 규정하고 있어 방문진료나 돌봄 서비스 확대가 가로막혀 있다. 농촌 주민의 건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틀이다.
현장의 목소리는 분명하다. 전문간호사 수준의 교육 강화, 방문진료 법제화, 복수 인력 배치와 원격 자문 시스템 도입 등 권한과 역량 확대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직역 확대 요구가 아니라, 의료 접근성의 격차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는 농촌 주민들을 위한 절박한 요청이다. 해외 주요국들이 이미 간호사에게 독립적 권한을 확대해 농촌 의료 공백을 메우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현 제도는 지나치게 뒤처져 있다.
농어촌 의료 격차 해소는 국가적 책무다. OECD 또한 한국에 지역사회 중심 의료체계로의 전환을 권고한 바 있다. 보건진료소를 단순한 보조 기관이 아닌, 지역 공공의료의 핵심 축으로 격상하는 입법적·제도적 개선이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 된다.
농촌 주민이 도시 주민과 같은 수준의 건강권을 누리는 사회, 이는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국가의 책무이자 헌법적 가치다. 보건진료소의 권한과 역할을 확대하는 것은 농촌 의료 붕괴를 막는 마지막 기회이자,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의료 형평성을 지켜내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