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내리고 있었고,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그러나 이른 새벽, 평화길을 걷는 이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경쾌했다. 누군가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비가 와야 진짜 DMZ이지!” 그 말에 웃음이 터졌고, 사람들은 비를 뚫고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한 시간의 여유가 만든 여운
전날보다 한 시간 늦은 새벽 5시에 시작한 열 번째 날. 전날 밤에는 기상청의 재난문자와 안전문자가 연이어 도착해 걱정이 컸다. “새벽부터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경고에 누군가는 우비를 꺼내 침대 곁에 두었고 누군가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걷기에 방해가 될 만큼의 비는 아니었다.
가볍게 체조를 마치고 걷기를 시작한 대열은 조용한 아침 안개를 가르며 평화누리길을 향해 나아갔다. 잔잔히 내리는 비는 오히려 숲의 초록을 더욱 진하게 적셨고 안개 낀 능선 위로 고요함이 깃들었다.
갑작스러운 집중호우, 그러나 모두 무사히
그러나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돌산령터널 출구에 가까워질 무렵, 핸드폰에서 또다시 경고음이 울렸다. “집중호우가 예상됩니다. 실외활동을 자제해 주십시오.”
마침 그 경고처럼, 비가 제법 굵어지기 시작했다. 산호길 정상 부근에 이르자 급경사와 쏟아지는 비가 겹쳐 일부 참가자들의 발길이 휘청거리기도 했다. 자칫하면 미끄러질 뻔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경험 많은 진행진과 서로를 도우려는 참가자들의 손길 덕분에 단 한 명의 부상자 없이 모두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비가 만든 그림 같은 풍경
걷기 코스는 평화누리길을 따라 이어졌다. 산허리를 감싼 안개, 축축하게 젖은 나뭇잎, 그리고 그 위로 걸어가는 사람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지키고 싶은 평화 아닐까요?” 어느 참가자의 말처럼, 이날의 풍경은 비에 젖은 만큼 더 깊은 감동을 주었다.
숙소인 DMZ 평화생명동산에 도착한 이들은 따뜻한 점심을 먹고 이곳저곳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간호돌봄봉사팀으로부터 케어를 받았다.
갈라진 발, 무너진 발톱… 그러나 멈추지 않는 이유
10일째 걷는 발은 더 이상 정상이라 할 수 없었다.
“발톱이 들렸어요.” 한 참가자가 조심스럽게 양말을 벗는다. 간호돌봄봉사팀 팀원은 코반을 감아 더 들리지 않도록 고정하고, 슬리퍼로 오래 걸어 발이 갈라지고 건조해진 부분엔 연고를 듬뿍 발라준다.
방수포로 감싼 뒤엔 “이제 좀 나아지셨죠?”라는 말 한 마디가 이어진다. 걷는 것만큼,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마음이 여정을 이끌고 있었다.
평화 위를 걷는다는 것
열흘째 걷는 길. 때로는 폭염, 때로는 폭우, 그리고 무너진 발톱까지. 그럼에도 참가자들은 계속 걷고 있다. 그 이유를 누군가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평화’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