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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간호대학 교수] 한경자   news@nursenews.co.kr     기사입력 2004-05-06 오전 10:53:13

　나에게 누구보다도 진솔하고 소박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살고 계신 한 분을 말하라면 서슴없이 미국 로드아일랜드대 간호대학의 Hesook Suzie Kim, 김혜숙 교수님을 꼽을 것이다. 간호이론의 세계적인 대가이신 그 분이 이달 30년간 봉직해온 로드아일랜드대에서 정년퇴임을 맞이하신다.

　내가 그 분을 본격적으로 가까이 뵙게 된 것은 해외파견교수로 로드아일랜드대에 연수를 갔을 때이다. 1997년 1월 처음 로드아일랜드 해안 근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바닷가 안개 때문이었는지 초저녁인데도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그 밤 혼자 썰렁한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느꼈던 감동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내가 집에서 즐겨먹던 인스턴트커피에서부터 참기름, 잘 익은 김장김치, 손수 빚으신 만두까지 냉장고가 꽉 채워져 있었다. 선생님과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됐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선생님 댁으로 들어가는 울창한 소나무 샛길을 얼마나 새로운 감동을 갖고 드나들었는지 모른다.

　김혜숙 선생님의 인간관계에는 변함없는 진실함이 스며져있다. 그래서 그 분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한번은 선생님의 오랜 친구분들 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한국인인 선생님이 그 모임의 중심에 있고 선생님으로 인해 모임이 지속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선생님께선 새로운 일을 만드는데 즐겁게 앞장섰고 친구들은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 활력이 넘쳤다. 시금치나물무침, 불고기 등 한국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한 모임은 매우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친구들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늘 선생님께 두부가 듬뿍 들어간 튀김만두를 열광적으로 기대하고 선생님 역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동료교수들에게 선생님은 학문적인 리더였을 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든 상의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심지어 교수들의 컴퓨터시스템 문제도 자주 해결해주시곤 하셨다. 선생님께선 자주 자신의 이론적 접근과 연구에 대해 교수들과 세미나를 가지셨고, 학교게시판에는 늘 선생님의 학술논제가 붙어있었다. 선생님께선 6년 동안의 간호대학장 시절 자신의 이론적 틀에 기초하여 로드아일랜드대 간호대학의 교육과정을 개편하는데 성공하셨다.

　한번은 내가 선생님의 맞은 편 연구실에 앉아있는데 한 교수가 선생님 방으로 올라와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로드아일랜드대 주최 학술회의를 맡기로 한 교수가 별안간 사정이 생겨 비상이 걸린 것이었다. 이때 선생님께서 나서서 그 일을 스스로 맡으셨고 행사가 성공리에 끝날 수 있었다. 이렇듯 누구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선생님을 찾는다. 한 박사과정생은 “Suzie는 이 학교의 영원한 학장이에요”라고 귀띔해주기도 했다.

　선생님은 가수 정태춘의 노래를 즐겨 들으시고 고추장 담그어 항아리에 익혀 드시며 겨울이면 김장김치에 동치미를 행사처럼 담그신다. 연례행사처럼 노르웨이 혹은 스웨덴 그리고 한국으로 강의하러 오시는 등 일년 중 거지반을 이런저런 일로 집을 비우신다. 또 매일 아침 8시부터 학교연구실에서 학생면담과 회의 등 일에 몰두하다보니 점심 거르실 때가 많다. 퇴근 후에는 자주 필드에 나가 사부님과 함께 골프를 치시며, 뜨개질을 잘하셔서 손수 뜨신 스웨터는 훌륭하게 예술적 가치가 있다.

　난 선생님께서 언제 그 많은 강의 준비를 하시고 연구 작업을 하실 수 있을까가 늘 궁금했는데, 사부님의 말씀을 통해 아침 5시부터 2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오로지 선생님만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벽 2시간동안 선생님은 모든 일을 체계있게(선생님께서 즐겨 쓰시는 용어),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하신다.

　사실 선생님의 이론만큼 간호지식 개발을 위해 체계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보스톤에서 열린 미국 간호이론가회의에 참석했을 때, 토론자마다 Kim's 이론 틀에 의거하여 논의하기를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그만큼 이론이 모호하지 않고 체계적이기 때문이다. 로이 등 유명한 간호학자들, 박사과정생들의 토의가 몇 차례나 방향을 잃어갈 때마다 선생님께선 일어나 예리하게 핵심을 지적하셨다. 명실공히 이론적 사고의 안내자 역할을 하시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워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선생님께서는 퇴임 전의 5개년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오셨다. 그 한가지가 해마다 책을 출간하는 일이었고 이미 계획대로 출간되어 `간호학에서 이론적 사고의 본질'은 독일과 일본, 그리고 국내에서도 번역돼 있는 것으로 안다.

　선생님께선 퇴임 후에 로드아일랜드를 떠나 그동안 준비해 놓은 버지니아에 새로 지은 아름다운 집으로 이사를 가신다. 하지만 선생님에겐 퇴임 후에도 기여하실 일들이 전보다 더 많아지실 듯하다.

한 경 자(서울대 간호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