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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여중] 허임순   news@nursenews.co.kr     기사입력 2002-12-05 오전 10:27:16

　봉서리 할머니네 텅 빈 외양간 앞에서 나는 마당을 쓸고 있었다.

　"우리 막둥이가 집에 오니 집안이 훤해지는구먼…"
　지금처럼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 들일을 마치고 소를 앞세워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님이 하시던 말씀이다. 어머니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소죽을 퍼다가 구유에 넣어주면서, 소에게 "하루죙일 힘든 일 하랴 힘 들었쟈?"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쓸던 빗자락을 집어던지고, 외양간 구유가 있었다는 텅빈자리 앞으로 가서 소죽을 먹고 있을, 그 건강하던 누런 암소와,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늘 멀게만 생각되던 고향집에 온 것처럼, 나는 지금 어릴 적 부모님을 만나고 있다. 전생이 있다면 저 키가 자그만 하고, 동그란 얼굴을 한 할머니와는 무슨 인연이었을까? 지금도 내가 갚아야 할 많은 은혜를 입었었던 것일까? 직장일과 집안일, 그리고 통근까지 하는 힘든 생활에서 나는 혼자 계신 할머니의 외로움을 안타까워하며 왜 이렇게 오고 싶은 것일까?
　감꽃이 지고 콩알 같은 감이 달렸을 무렵, 봉서리 할머니는 감나무를 쳐다보시며 "감이 많이 달리면 가을에 침시를 해서 주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가을을 맞은 감은 병충해로 몇 개 남지 않았고, 그것마저도 하나둘 떨어져 마른 이파리와 엉겨서 나뒹굴어 주변에 파리만 윙윙대고 있었다.
　성한 감이 하나 있어 주워드니, 떨어지자마자 주워다가 소금 항아리에 넣어 놓고는, 말랑말랑하고 달콤하게 익기를 기다렸다가 먹었던 때가 생각난다. 내가 맛있게 먹고 있으면,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그게 그렇게 맛있어?"하고 물으시곤 했다.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연신 소금 항아리를 열어대면, 그런 나를 위해서 큼직한 감을 따서 넣어 주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빼앗아가듯 감나무 탄저병은 할머니의 베풀고 싶은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

　올해는 늦여름 극성스런 전염성 눈병으로 할머니를 찾아 뵙지 못하다가 한달 만에 혼자서 할머니집 마당에 들어섰다. 미리 전화를 하면 일거리를 준비해 놓으시던 할머니가 오늘은 한가하게 나를 맞으신다.
　"할머니 적적해서 어떻게 지내세요?" 마루에 걸터앉아 방문을 열어보며 내가 묻자 "할 수 없지! 옛날에는 방이 모자라게 북적대며 살었는데 … "
　이 덩그마니 큰집에서 밤이면 얼마나 무서우실까? 크고 넓은 부엌은 검게 그을려 낮에도 검은 고양이가 나올 것 같고, 뒤뜰 돌담 틈에는 구렁이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을 만큼 을씨년스럽다.
　장독대의 풀을 뽑으며 드러나는 큰 구멍들을 볼 때마다 뱀이라도 나올 것 같은 두려운 마음에 아이들에게 연신 "조심해라, 조심해! 조심해!"라고 당부하지만 아이들은 "선생님 땀 난 것 좀 보세요! 아유 힘들다"하며 엉덩방아를 찧으며 뿌리에 흙이 잔뜩 붙은 풀들을 털 줄도 모른 채 뽑아대기만 한다.
　
풀이 뽑힌 곳마다 할머니는 이름 모를 이런저런 콩씨를 심으셨다. 그러나 응달이 진 뒤뜰은 지금 들여다보니 쭉정이 콩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조금씩이나마 손이 미치고 보니, 잿불에서 작은 불씨가 살아나듯, 집안은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늘져 보이던 할머니의 안색은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삶에 활기를 찾으신 것처럼 요즘은 환하게 밝은 웃음도 보이신다.

　얼마 전에는 어렵게 허락을 받아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언제 넣었는지 알 수 없는, 곰팡이가 가득 핀 반찬들이 쌓여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버리자고 하자, 할머니는 무척 아까워하시며, 다시 열어보고 냉장고에 다시 넣으려고 하셨다.

　"이것 드셨다가 탈나시면 어떻게 하시려구요?"하고 말씀을 드리니,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청소를 하고는, 적십자 봉사관에 이런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반찬을 해다 주겠다고 했다. 이제 할머니의 냉장고는 푸른 빛깔을 내는 김치가 투명한 통속에서 신선함을 더해주고 있다.

　무릎이 시원치 않으신 할머니는, 엉덩이로 밀어 이방 저방 다니며 밥도 짓고 빨래도 하신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다니는 화장실은 마당을 지나 헛간으로 가서, 걸쳐진 바람막이를 걷어올리고 나가야하는 뒤뜰 콩밭 저 끝에 있다. 아차 하면 빠질 것 같고, 잘못하면 튀어서 엉덩이를 다 버릴 것만 같은 그런 화장실이다. 지붕은 나무가지 몇 개를 세워 끝을 묶었고, 비닐하우스에 썼던 너덜너덜한 보온용 조각들이 하늘을 조금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눈이 오면 미끄러지진 않을지 걱정해 주는 자식은 아무도 없다. 그저 마루 밑을 지키는 냄새나는 요강이 효자일 뿐.

　교장선생님께서 화장실 공사를 위해 학교 아저씨들의 손을 빌려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고작 빨래, 청소밖에 해드리는 것이 없어 죄송할 따름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찾아주는 나를 늘 고마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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