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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간호문학상 소설 당선작
회색사나이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10-12-23 오후 16:10:20
- 김민아 (대구가톨릭대 간호학과 2학년)
친구가 사라졌다.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친구가 사라진 뒤 정확히 3일째 되는 날 식구들은 그녀의 부재를 알았다. 주말동안 개인사로 바쁜 식구들은 월요일 오전 그녀의 직장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녀가 증발하였음을 알았다고 한다. 실종 후 3일이 지나서야 겨우 실종신고를 한 그녀의 식구들은 매우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마침 그녀의 동생은 기지를 발휘하여 그녀의 다이어리를 조사하였다.
그녀의 다이어리 속에는 토요일 오후 나와의 약속을 마지막으로 아무 예정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그녀는 꼼꼼한 성격 탓에 다이어리에 사소한 개인사 혹은 스케줄을 빡빡이 적어놓았다. 심지어 절친한 친구 연락처도 다이어리 마지막장에 비상연락망으로 적어놓기도 하였다. 친한 친구였지만 그녀와 달리 나는 천성이 게으른 탓에 다이어리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남기는 행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번은 내가 그녀에게 다이어리를 열심히 적는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간단하였다. 자꾸 무엇인가를 잊어버린다고 하였다. 그것이 물건이든 추억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텅텅 비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엇이든 다이어리에 적으면 안심이 된다고 하였다. 결국 텅텅 비어가는 그녀의 머릿속을 다이어리가 대신하는 것이었다.
어찌하든 그녀의 다이어리 덕분에 손쉽게 실종 전 행방을 알아낸 그녀의 동생은 연락망에 적힌 전화번호로 나에게 연락하였다. 그녀의 동생이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한창 학원수업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학원 강사 목소리를 빼고는 조용한 강의실에서 내 폰이 시끄럽게 진동소리를 내자 순간 나는 매우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폰 화면에 떠있는 번호만 보고나서 끊어버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아는 번호라도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모르는 번호라는 것을 확인하니 짜증이 더 솟구쳤다. 주저 없이 끊어버린 폰을 뒤로하고 수업에 집중할 때 다시 진동소리가 교실을 울리었다. 계속 진동소리를 내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아예 통째로 꺼버리고 배터리까지 빼버렸다.
그 후 학원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나설 때 꺼져버린 휴대폰이 생각난 나는 다시 전원을 켰다. 그때 나는 기겁하였다.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더니 순식간에 메시지함이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재중 전화도 백통 가까이 와서 매우 화가 났다. 나는 문자와 전화를 백통 가까이 보낸 또라이 자식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고 그녀의 동생인 또라이 자식과 가까스로 연락이 닿게 되었다. 이렇게 전화통화를 통해서 나는 얼떨결에 그녀의 동생과 만나게 되었다.
처음 그녀의 동생을 보았을 때 동생의 얼굴에는 언니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서려있었다. 그녀의 동생은 나와의 만남이 그녀의 실종사건에 큰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언니가 단순히 일상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가출하였으며 내가 숨겨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동생은 다짜고짜 실종되기 전 언니의 행방과 가볼만한 곳에 대하여 물었고 나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동생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실종당일 언니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을 혼자 힘으로 찾아서 그 사람에게 연락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드문 확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찾고자 집착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학원을 마치고 밀려오는 피로 때문에 아무 의욕이 없었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제 술집에서 헤어진 뒤로 보지 못했어.”
그녀의 동생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날 눈에 띄는 행동은 없었나요. 아니면 평소와 다른 점이라도 없었어요?”
그녀 동생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가 평소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날 그녀를 자세히 생각해보니 많이 들떠있었으며 또한 우울해한 것 같았다. 며칠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그 문제로 힘들어했지만 사라질 정도로 큰 사건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하였다. 그녀는 사춘기를 겪는 소녀가 아니었다. 중고등학생들처럼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서 행동할 나이가 지났다는 의미였다.
문득 맞은편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 동생의 축 쳐진 어깨가 보였다. 나는 기분 탓에 그렇게 보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침 그때 그녀의 동생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납치사건이라면 협박전화라도 걸려왔겠지만 아무연락이 없어요. 경찰에서 실종 신고를 했지만 한 달에 수십 건씩 들어오는 것이 실종신고라고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어요. 혹시라도 모르니 집에서 언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으라는 무심한 소리만 들었죠.”
나는 처녀가 납치되는 것이 꼭 협박전화를 통해 몸값을 요구하는 범죄만 있지 않다고 그녀의 동생에게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예의상 입을 꼭 다물었다. 사실 실종신고만큼 미해결 사건이 많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연락이 없다는 것은 그녀가 제 발로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마도 시체로 발견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거나 운이 더 나쁘면 시체도 찾지 못한 채로 영원히 행방이 묘연해 질수도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곤란한 마음에 ‘잠깐 머리를 식히러 여행을 갔겠지. 요즘 애인과 헤어져서 힘들어했거든’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릴 뒤죽박죽 하였다.
그녀의 동생은 깊이 생각에 빠진 채로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동생은 그녀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였다. 그곳에 간다고 딱히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며 내심 내키지 않았지만 실종된 친구에 대한 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였다.
그녀가 증발해버린 날 나는 그녀와 같이 술을 마시던 술집으로 그녀의 동생을 안내하였다. 우리는 술집 문을 열기에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그 가게를 방문하여 그녀와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던 자리에 앉아 똑같은 안주와 술을 주문하였다.
실종된 친구는 이른바 3초 여대생이었다. 이제 회사원이 되었으니 3초 여사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녀를 3초 여대생이라고 부른 이유는 실로 간단하였다. 흔히들 말하는 3초 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디자인의 명품가방을 거리에 3초마다 볼 수 있다고 붙어진 이름이 3초 백이다. 이처럼 그녀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에서 3초마다 튀어나오는 무난한 여대생이었다. 옆에는 3초 명품가방을 들고 잘빠진 청바지와 아찔한 높이의 굽을 지닌 킬힐을 신고 다녔다.
때때로는 그녀의 풋풋함을 살려주는 쉬폰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활개치고 다녔다. 마치 ‘모모’에 나오는 회색양복만 고집하는 회색사나이들처럼 거리에 쏟아지는 여대생들과 비슷한 복장을 맞추고 거리를 나섰다. 한때 나는 그녀가 회색사나이의 업그레이드 모형일지도 모르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녀는 회색사나이들처럼 언제나 시간에 쫒기고 있었기에 나의 생각은 짐작을 넘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매일 빡빡하게 스케줄을 잡고 공부와 운동, 취미생활을 수행하였다.
그녀는 순간순간을 즐기지 않았다. 또한 결코 인생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하루에 계획된 일정은 모두 그녀가 수행해야 할 임무였고 묵묵히 몽땅 해내었다. 그녀가 다이어리에 계속 무엇인가 적어대는 이유도 자꾸 잊어버리는 스케줄을 미리알고 파악하며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의 다이어리를 몰래 훔쳐보았을 때 다이어리 속 내용은 온통 하루계획과 미흡한 일에 대한 반성 또는 자책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초 여대생은 이렇게 매일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연애도 임무와 같았다. 그녀는 주위사람들 모두가 연애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완벽한 연애를 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완벽한 연애를 하기 원하였고 그 조건으로 완벽한 애인을 필요로 하였다. 그녀는 스스로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남자를 찾아다녔으며 직장 선배의 소개로 자신의 완벽한 연애를 수행할 상대역을 드디어 찾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그를 그리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아마도 다소 초라한 그의 외모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지적인 머리를 가졌으며 자신이 찾는 조건에 부합한 남자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임무를 완수하듯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매일 그와 만나며 다른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기념일이 있을 때는 근사한 와인하우스에서 저녁을 보내는 여유도 부렸다.
하지만 얼마 전 그에게서 헤어지자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으며 그녀는 매우 침울해하였다. 헤어지는 이유가 명확하였다면 그녀는 덜 우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시원한 답을 내려주지 않았기에 그녀는 약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다만 그는 막연하게 너와 함께 있으면 무엇인가 알게 모르게 중요한 무엇이 빠져버린 느낌이라고만 답하였다. 마치 자신의 몸에 나사 한 개가 빠져버린 것만 같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날 그녀는 내 앞에 찾아와 미친 듯이 웃어대며 담배를 피웠다.
그녀가 실종된 그날도 그녀는 온몸에 우울함을 발산하며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치회색사나이가 시간의 잎을 말아서 시가를 피우는 듯 술집 천장에는 회색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담배는 흡사 회색사나이가 소지하고 있는 시가인 모양인지 담배를 태우며 그녀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던 그녀가 마치 담배 속에 시간을 저장해 놓은 것처럼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가 회색사나이 업그레이드 형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쉴 새 없이 자신이 싫어하는 상사 욕을 하였다. 그러더니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이렇게 한창동안 그녀와 나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씁쓸해진 내 입 속으로 삼겹살을 우겨넣을 때였다. 그녀가 일어섰다. 물 빼러간다고 말하며 화장실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그녀가 걸어가는 동안 담배가 갑자기 고파진 나는 얼른 그녀의 담뱃갑을 숨겼다.
솔직히 말하면 2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나는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담배 살 돈을 아끼고 있는 형편이었다. 2년 동안 낙방하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나를 부모님은 탐탁지 않게 여기며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었다. 다행히 석달치 학원비를 미리 내어서 여전히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숙식은 집에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기호물품인 담배는 용돈 없이 구입하기 곤란하였다. 한참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해 금단증상에 시달리던 나는 친구 몰래 담뱃갑채로 담배를 훔친 것이었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돌아온 뒤 담배가 사라진 것도 새까맣게 모른 상태로 나와 헤어졌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증발해 버린 것이다. 어쩌면 시간을 말린 시가가 없어지면 사라지는 회색사나이처럼 그녀도 내가 담배를 감추었기 때문에 증발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그녀의 동생과 마주보고 앉아있기 거북하였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리에 일어났다. 갑자기 떠나는 나를 그녀의 동생은 잡지 않았다. 그녀의 동생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동안 회색사나이, 담배 이 두 단어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실종된 친구와 내 옛 애인이 둥그런 탁자에 둘러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참동안 애벌레처럼 이불을 몸에 감아 침대위에 누워있었다. 간밤에 꾼 꿈이 기억나서 머리가 복잡하였다.
사실 내 주변에는 3초 여대생 말고도 회색사나이로 의심되는 인물이 있었다. 그 인물은 바로 나와 1년 전에 헤어진 옛 애인이다. 내가 그를 회색사나이로 의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하늘색 폴로 티셔츠 때문이었다. 그가 대학교 3학년 무렵에 하늘색 폴로 티셔츠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닌 적이 있었다. 비교적 큰 몸집에 살집이 있는 그는 하늘색 폴로 티셔츠와 매우 어울리지 않았으며 거대해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그것이 어울리든 안어울리든 그 옷만 고집하였다.
그 해 초여름 나는 대학캠퍼스 안에서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하늘색 폴로티를 입은 남자무리들이 곳곳이 보였다. 이것은 흡사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처럼 그가 자가분열하여 캠퍼스 곳곳에 자신을 심어놓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르네마그리트 겨울비처럼 그들이 비가 되어 내려와 캠퍼스 곳곳에 박혀버렸는지도 몰랐다.
혼자보기 아까운 장관에 나는 감탄하며 그 무리들을 포함한 내 애인 모두가 회색양복만 입고 다니는 회색사나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더 이상 눈에 띄는 회색양복을 그만 고집하고 유니폼을 색다르게 바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계절마다 아니면 한 달 아니 일주일마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유니폼을 바꾸었을지도 몰랐다. 흡사 과티처럼 하늘색 폴로 티셔츠를 맞춰 입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그들을 보며 나의 가설이 얼추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얼마나 끔찍하고 경악스러운 일인가 생각하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회색사나이답게 담배를 쉴 새 없이 피웠다. 하지만 그는 하늘색 폴로 티셔츠 사건이후로 회색사나이로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를 회색사나이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 앞에 언제나 행동을 조심스레 하면서 지극히 정상인인 척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친구들과 있으면 장안유협 경박자로 돌변하였다. 하루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그가 여자들은 명품시계를 걸친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는 술이 들어가면 꼭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데 그만큼 그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인사불성이 된 다음날에 자기가 어떤 일을 하였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속편한 타입이었다. 그는 술을 마신 후에 자신이 한 모든 행동들을 지우개 지우듯이 하얗게 지우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였다. 진짜로 필름이 끊겨서 잊어버린 것인지 단순히 음주동안의 행동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잊은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늘색 폴로 티셔츠를 사랑한 그는 비록 경박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지만 웃을 때만큼은 소년 같았다.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해맑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보이는 미소 때문에 계속 그와 만났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의 미소는 나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미소는 때때로 빡빡한 생활 속에 탄산수처럼 시원한 청량감을 주기도 하였다. 문득 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그와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골똘히 생각하였다.
추억을 상기시키는 동안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불을 감은 몸을 침대위에 굴리며 눈을 감았다. 그의 미소가 어떤 느낌이었는가에 대한 단어들만 떠다닐 뿐 그의 생김새도 미소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술을 마신 뒤 모든 상황을 말끔히 지우듯 내 머릿속 추억들도 그의 생김새도 지우개로 하얗게 지워진 것 같았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의 생김새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하였다. 그는 내 인생에서 떠나버린 사람이었고 더 이상 나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친구의 실종사건 이후 나를 사로잡는 회색사나이라는 주제가 그의 얼굴을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게으르게 침대 위를 뒹굴던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랍을 뒤졌다. 혹시라도 남겨놓은 그의 사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헤어지고 덤덤하게 내다버린 사진 중에 남겨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나는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다. 나는 사진에 찍히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호들갑 떨며 디지털 카메라로 쉽게 사진을 찍고 용량이 부족하면 쉽게 찍은 사진파일을 휴지통에 버리는 부류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한 나의 관점으로 볼 때 선별된 사진만으로 당시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처절한 노력 같아서 내키지가 않았다. 유난히 사진에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나를 알기에 그는 중요한 날에만 나와 사진을 찍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은 많지 않았다. 나는 그와 헤어진 후 함께 찍힌 사진들을 버리면서 양이 많지 않아서 버리기 편하다고 생각한 사실이 떠올랐다.
연달아서 그와 헤어진 이유가 그의 유학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헤어진 그는 나와 달리 명문대 학생이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공기업에 취업하기를 원하였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듯하였다. 그는 대학교 시절 학점관리에 신경을 기울었기 때문에 성적도 우수하였다. 각종대회 수상경력도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대외 활동도 활발했고 무엇보다 어학능력이 빼어났었다. 소위 요즘 말하는 고스펙을 갖춘 취업준비생이었다. 그는 당연히 공기업에 지원서를 보냈으며 일차합격 하였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공기업은 일반회사와 달리 일차 서류통과에서 지원자들을 많이 뽑고 면접에서 떨어뜨리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매우 힘들어 하였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조금 더 열심히 준비하면 공기업에 취업할 수 있다고 낙관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공기업에 최종합격이 될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도 될 수 있었다.
2년 동안 연이은 실패는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는 심리적으로 가장 친밀한 사이인 나에게 기대고자 하였다. 그와 만나면 그는 나에게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기 일쑤였다. 그는 애인이라면 응당 자기의 응석을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응석을 받아주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다만 방관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괴로워하는 일들이 나의 감정과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서운하겠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내 인생에 있어서 무료한 현실에 유희거리를 가져다주는 인물이었다.
연애는 꽤 재미있는 놀이었다.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 웃고 울며 화내며 기뻐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이었다. 아찔한 기분도 들었지만 권태로운 느낌도 들었다. 그는 따분한 일상에 변화와 이야기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 인생에 중요한 그와 헤어지고 나서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만 보아도 그는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하였다.
한때 나는 그의 하소연과 우울함이 배부른 사람의 푸념으로 들리기도 하였다. 나는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잠재적 실업자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지금이라도 공기업을 포기한다면 쉽사리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부러워서 심통을 부리고 싶었다. 스스로 만약 내가 공기업에 지원한다면 서류에서라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접근하자 한없이 비참해지고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매번 그런 기분으로 그를 대하게되자 그를 만나는 것이 이제 고역이 되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겨울이었다. 그날은 전날에 눈이 많이 내려서 거리가 빙판이 되었다. 굳이 오늘 만나야 한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남자친구만 없었다면 외출을 일절 삼갔을 것이다. 나는 겨우 짜증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집근처 카페에서 보기로 약속하였다. 집에서 카페로 가는 동안 부츠를 신은 나는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결국 언덕을 내려갈 때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넘어진 순간 하필 이런 날에 보자고 우긴 그에 대하여 원망이 솟구쳤다. 내가 아끼던 청바지와 코트는 흙으로 더러워진 빙판 때문에 흙탕물이 들었다. 청바지는 그럭저럭 입겠지만 하얀 코트는 누렇게 얼룩이 그려져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방으로 대충 코트 얼룩을 숨기고 카페로 향하였다.
카페에 도착하여 들어설 때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가 보였다. 흡연구역이 따로 마련된 카페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흡연구역을 유리벽으로 사방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유리새장에 갇힌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나는 유리새장에 유일한 탈출구인 유리문을 열고 그가 앉은 자리로 갔다. 그와 마주보며 둥그런 소파에 앉았다. 그는 담배를 끄면서 나에게 커피를 마실 것이냐고 물어왔다. 내가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다짜고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지금까지 들은 것을 합하면 300번은 족히 넘는 그의 어리광이라고 지례짐작하고 지루함에 귀를 닫아버렸다.
나는 건성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맞은편 벽화를 보았다. 키스 해링 작품을 모방한 벽화가 보였다. 벽화 속에는 키스 해링 작품처럼 마치 졸라맨을 연상시키는 노란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롤리팝 사탕같은 큰 머리에 뼈대만 보이는 졸라맨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왜냐하면 나와 마주 앉은 그와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유리벽너머 보이는 벽화 속 졸라맨은 내 위치에서 보면 그와 나란히 앉아있는 것 같았다. 피식 웃는 나를 보면서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은 것이 매우 거슬린다는 표현이었다.
나는 그를 계속 쳐다보면 계속 웃을 것만 같아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자리에는 근사한 트위드 코트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검은 트위드 코트에 금색 실이 박음질 된 모습이 매우 근사해 보였다. 마침 내가 입은 하얀색 코트의 누런 얼룩이 생각나자 하나 장만할까라는 고민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저 코트는 얼마쯤 할까. 내가 모은 용돈으로 가능하겠지’라는 생각에 한참동안 빠져있을 때였다.
“너는 구제불능 이기적인 속물이구나.”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난 듯이 들렸지만 이상하게 매우 차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퍼붓는 심한 언사에 기분이 상하였다. 황당함에 붉어진 볼을 감싸며 그를 노려보았다. 화가 가슴 속에서 머리끝까지 꾸역꾸역 밀려올라왔다. 당장이라도 너 또한 만만치 않은 속물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사실 그는 나와 못지않은 속물근성을 내비치곤 하였다. 그가 계획하는 좋은 직장과 여유로운 삶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대학교시절 풋사랑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근사한 인생계획에 나를 불청객으로 치부하였다. 종국에 그는 자신의 인생계획에서 나를 영원히 삭제시켰다. 그런 그가 내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나는 그를 방관자의 시선으로 보기로 결정하였으며 또한 그렇게 행동하였다. 이런 내가 지금에 와서 그에게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담뱃갑을 만지며 덤덤하게 앉아있었다. 화를 내는 것도 귀찮았으며 내 속마음을 말한들 바뀔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나로 인하여 바뀔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질렸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카페를 나갔다. 나는 그가 남겨놓은 담뱃갑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그는 나에게 일절 연락이 없었다. 그 뒤 그를 소개시켜 준 친구를 통해 그가 유학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정확히 그를 마지막으로 본 뒤 10일이 지나서야 그가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종된 친구와 전 애인은 모두 담뱃갑만 놓아두고 나에게서 떠나버렸다. 회색사나이들은 마지막 선물로 상대편에게 목숨만큼 귀한 담배를 주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았다. 나는 사진을 찾으러 서랍을 뒤지던 손을 다시 담뱃갑 찾기로 몰입하였다. 회색연기를 뿜으며 회색사나이들의 몸을 가려주던 담배연기가 절실해졌다. 담배를 피우면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담배를 찾는 나의 손길이 빨라졌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 그들의 마지막 심정을 알 수 있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미친 듯이 서랍을 뒤졌다. 하지만 서랍 어디에도 담뱃갑은커녕 라이터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장의 책을 모두 끄집어내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어머니에게 담배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간혹 책 사이에 끼어놓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미친 듯이 책 사이를 뒤집기 시작하였다. 어느 곳에도 담배는 보이지 않았다. 계속 화장대도 살펴보고 심지어 침대 밑도 샅샅이 살펴보았다.
방안 곳곳을 다니며 담배를 찾는 동안 문득 나는 담배를 찾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알기 싫었다. 싫은 것을 넘어서 그들의 진심이 두려웠다. 나는 그들과 진심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척 했지만 세상 어느 누구와도 소통하기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회색사나이들과 사귀었고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온 것이었다. 계속 피상적인 관계만 쌓는 것을 보고 혹자는 내가 둔해서 상대편의 마음을 기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게으르기 때문에 상대편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귀찮아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회색사나이며 피상적인 관계만을 편안해하였다. 나는 그들의 진심이 두려웠다. 지난 몇 년 동안 얌전히 지내던 그들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일시적인 변덕을 부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괴로운 자신의 처지 때문에 회색사나이로서 특성을 잠깐 잃어버렸을 것일지도 몰랐다.
3초 여대생은 실종되던 당일 자신이 아끼는 시간을 허비하며 나에게 위로받고 싶어 하였다. 나의 전 애인은 마지막 날 자신의 아쉬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였다. 그들은 시간 혹은 마음을 건네주며 나에게 무엇인가를 받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나에게 주고 나서 받기를 원하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미안했지만 한편으로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부터 우리들은 서로가 회색사나이임을 알고 있었다. 회색사나이들 관계에 대한 암묵적인 룰을 무시한 것은 저들이었다.
나는 온통 회색연기 속에 갇혀 길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실종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옛 애인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젯밤 꿈에서 생생하게 보았던 얼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겠지 생각하며 막연히 바라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생김새가 나의 인생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침 방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말이라고 방에서 뒹굴지 말고 외출이라도 해라.”
그녀의 심기 불편한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녀가 마치 나를 더러운 애벌레 보듯이 바라본 눈길이 생각났다. 나는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가 된 기분으로 화장실 세면대로 갔다. 내가 얼굴을 씻는 동안 현관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세면대 거울을 보며 눈 두 개, 코 하나를 중얼거리다가 중대한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흡사 내 뒤통수를 야구방망이로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에 멍하게 있었다. 그 순간 내 멍한 머리위로 아파트 복도를 울리는 그녀의 힐 소리가 담배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친구가 사라졌다.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친구가 사라진 뒤 정확히 3일째 되는 날 식구들은 그녀의 부재를 알았다. 주말동안 개인사로 바쁜 식구들은 월요일 오전 그녀의 직장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녀가 증발하였음을 알았다고 한다. 실종 후 3일이 지나서야 겨우 실종신고를 한 그녀의 식구들은 매우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마침 그녀의 동생은 기지를 발휘하여 그녀의 다이어리를 조사하였다.
그녀의 다이어리 속에는 토요일 오후 나와의 약속을 마지막으로 아무 예정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그녀는 꼼꼼한 성격 탓에 다이어리에 사소한 개인사 혹은 스케줄을 빡빡이 적어놓았다. 심지어 절친한 친구 연락처도 다이어리 마지막장에 비상연락망으로 적어놓기도 하였다. 친한 친구였지만 그녀와 달리 나는 천성이 게으른 탓에 다이어리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남기는 행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번은 내가 그녀에게 다이어리를 열심히 적는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간단하였다. 자꾸 무엇인가를 잊어버린다고 하였다. 그것이 물건이든 추억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텅텅 비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엇이든 다이어리에 적으면 안심이 된다고 하였다. 결국 텅텅 비어가는 그녀의 머릿속을 다이어리가 대신하는 것이었다.
어찌하든 그녀의 다이어리 덕분에 손쉽게 실종 전 행방을 알아낸 그녀의 동생은 연락망에 적힌 전화번호로 나에게 연락하였다. 그녀의 동생이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한창 학원수업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학원 강사 목소리를 빼고는 조용한 강의실에서 내 폰이 시끄럽게 진동소리를 내자 순간 나는 매우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폰 화면에 떠있는 번호만 보고나서 끊어버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아는 번호라도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모르는 번호라는 것을 확인하니 짜증이 더 솟구쳤다. 주저 없이 끊어버린 폰을 뒤로하고 수업에 집중할 때 다시 진동소리가 교실을 울리었다. 계속 진동소리를 내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아예 통째로 꺼버리고 배터리까지 빼버렸다.
그 후 학원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나설 때 꺼져버린 휴대폰이 생각난 나는 다시 전원을 켰다. 그때 나는 기겁하였다.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더니 순식간에 메시지함이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재중 전화도 백통 가까이 와서 매우 화가 났다. 나는 문자와 전화를 백통 가까이 보낸 또라이 자식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고 그녀의 동생인 또라이 자식과 가까스로 연락이 닿게 되었다. 이렇게 전화통화를 통해서 나는 얼떨결에 그녀의 동생과 만나게 되었다.
처음 그녀의 동생을 보았을 때 동생의 얼굴에는 언니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서려있었다. 그녀의 동생은 나와의 만남이 그녀의 실종사건에 큰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언니가 단순히 일상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가출하였으며 내가 숨겨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동생은 다짜고짜 실종되기 전 언니의 행방과 가볼만한 곳에 대하여 물었고 나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동생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실종당일 언니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을 혼자 힘으로 찾아서 그 사람에게 연락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드문 확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찾고자 집착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학원을 마치고 밀려오는 피로 때문에 아무 의욕이 없었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제 술집에서 헤어진 뒤로 보지 못했어.”
그녀의 동생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날 눈에 띄는 행동은 없었나요. 아니면 평소와 다른 점이라도 없었어요?”
그녀 동생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가 평소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날 그녀를 자세히 생각해보니 많이 들떠있었으며 또한 우울해한 것 같았다. 며칠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그 문제로 힘들어했지만 사라질 정도로 큰 사건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하였다. 그녀는 사춘기를 겪는 소녀가 아니었다. 중고등학생들처럼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서 행동할 나이가 지났다는 의미였다.
문득 맞은편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 동생의 축 쳐진 어깨가 보였다. 나는 기분 탓에 그렇게 보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침 그때 그녀의 동생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납치사건이라면 협박전화라도 걸려왔겠지만 아무연락이 없어요. 경찰에서 실종 신고를 했지만 한 달에 수십 건씩 들어오는 것이 실종신고라고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어요. 혹시라도 모르니 집에서 언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으라는 무심한 소리만 들었죠.”
나는 처녀가 납치되는 것이 꼭 협박전화를 통해 몸값을 요구하는 범죄만 있지 않다고 그녀의 동생에게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예의상 입을 꼭 다물었다. 사실 실종신고만큼 미해결 사건이 많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연락이 없다는 것은 그녀가 제 발로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마도 시체로 발견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거나 운이 더 나쁘면 시체도 찾지 못한 채로 영원히 행방이 묘연해 질수도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곤란한 마음에 ‘잠깐 머리를 식히러 여행을 갔겠지. 요즘 애인과 헤어져서 힘들어했거든’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릴 뒤죽박죽 하였다.
그녀의 동생은 깊이 생각에 빠진 채로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동생은 그녀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였다. 그곳에 간다고 딱히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며 내심 내키지 않았지만 실종된 친구에 대한 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였다.
그녀가 증발해버린 날 나는 그녀와 같이 술을 마시던 술집으로 그녀의 동생을 안내하였다. 우리는 술집 문을 열기에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그 가게를 방문하여 그녀와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던 자리에 앉아 똑같은 안주와 술을 주문하였다.
실종된 친구는 이른바 3초 여대생이었다. 이제 회사원이 되었으니 3초 여사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녀를 3초 여대생이라고 부른 이유는 실로 간단하였다. 흔히들 말하는 3초 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디자인의 명품가방을 거리에 3초마다 볼 수 있다고 붙어진 이름이 3초 백이다. 이처럼 그녀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에서 3초마다 튀어나오는 무난한 여대생이었다. 옆에는 3초 명품가방을 들고 잘빠진 청바지와 아찔한 높이의 굽을 지닌 킬힐을 신고 다녔다.
때때로는 그녀의 풋풋함을 살려주는 쉬폰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활개치고 다녔다. 마치 ‘모모’에 나오는 회색양복만 고집하는 회색사나이들처럼 거리에 쏟아지는 여대생들과 비슷한 복장을 맞추고 거리를 나섰다. 한때 나는 그녀가 회색사나이의 업그레이드 모형일지도 모르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녀는 회색사나이들처럼 언제나 시간에 쫒기고 있었기에 나의 생각은 짐작을 넘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매일 빡빡하게 스케줄을 잡고 공부와 운동, 취미생활을 수행하였다.
그녀는 순간순간을 즐기지 않았다. 또한 결코 인생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하루에 계획된 일정은 모두 그녀가 수행해야 할 임무였고 묵묵히 몽땅 해내었다. 그녀가 다이어리에 계속 무엇인가 적어대는 이유도 자꾸 잊어버리는 스케줄을 미리알고 파악하며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의 다이어리를 몰래 훔쳐보았을 때 다이어리 속 내용은 온통 하루계획과 미흡한 일에 대한 반성 또는 자책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초 여대생은 이렇게 매일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연애도 임무와 같았다. 그녀는 주위사람들 모두가 연애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완벽한 연애를 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완벽한 연애를 하기 원하였고 그 조건으로 완벽한 애인을 필요로 하였다. 그녀는 스스로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남자를 찾아다녔으며 직장 선배의 소개로 자신의 완벽한 연애를 수행할 상대역을 드디어 찾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그를 그리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아마도 다소 초라한 그의 외모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지적인 머리를 가졌으며 자신이 찾는 조건에 부합한 남자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임무를 완수하듯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매일 그와 만나며 다른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기념일이 있을 때는 근사한 와인하우스에서 저녁을 보내는 여유도 부렸다.
하지만 얼마 전 그에게서 헤어지자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으며 그녀는 매우 침울해하였다. 헤어지는 이유가 명확하였다면 그녀는 덜 우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시원한 답을 내려주지 않았기에 그녀는 약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다만 그는 막연하게 너와 함께 있으면 무엇인가 알게 모르게 중요한 무엇이 빠져버린 느낌이라고만 답하였다. 마치 자신의 몸에 나사 한 개가 빠져버린 것만 같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날 그녀는 내 앞에 찾아와 미친 듯이 웃어대며 담배를 피웠다.
그녀가 실종된 그날도 그녀는 온몸에 우울함을 발산하며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치회색사나이가 시간의 잎을 말아서 시가를 피우는 듯 술집 천장에는 회색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담배는 흡사 회색사나이가 소지하고 있는 시가인 모양인지 담배를 태우며 그녀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던 그녀가 마치 담배 속에 시간을 저장해 놓은 것처럼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가 회색사나이 업그레이드 형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쉴 새 없이 자신이 싫어하는 상사 욕을 하였다. 그러더니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이렇게 한창동안 그녀와 나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씁쓸해진 내 입 속으로 삼겹살을 우겨넣을 때였다. 그녀가 일어섰다. 물 빼러간다고 말하며 화장실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그녀가 걸어가는 동안 담배가 갑자기 고파진 나는 얼른 그녀의 담뱃갑을 숨겼다.
솔직히 말하면 2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나는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담배 살 돈을 아끼고 있는 형편이었다. 2년 동안 낙방하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나를 부모님은 탐탁지 않게 여기며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었다. 다행히 석달치 학원비를 미리 내어서 여전히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숙식은 집에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기호물품인 담배는 용돈 없이 구입하기 곤란하였다. 한참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해 금단증상에 시달리던 나는 친구 몰래 담뱃갑채로 담배를 훔친 것이었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돌아온 뒤 담배가 사라진 것도 새까맣게 모른 상태로 나와 헤어졌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증발해 버린 것이다. 어쩌면 시간을 말린 시가가 없어지면 사라지는 회색사나이처럼 그녀도 내가 담배를 감추었기 때문에 증발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그녀의 동생과 마주보고 앉아있기 거북하였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리에 일어났다. 갑자기 떠나는 나를 그녀의 동생은 잡지 않았다. 그녀의 동생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동안 회색사나이, 담배 이 두 단어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실종된 친구와 내 옛 애인이 둥그런 탁자에 둘러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참동안 애벌레처럼 이불을 몸에 감아 침대위에 누워있었다. 간밤에 꾼 꿈이 기억나서 머리가 복잡하였다.
사실 내 주변에는 3초 여대생 말고도 회색사나이로 의심되는 인물이 있었다. 그 인물은 바로 나와 1년 전에 헤어진 옛 애인이다. 내가 그를 회색사나이로 의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하늘색 폴로 티셔츠 때문이었다. 그가 대학교 3학년 무렵에 하늘색 폴로 티셔츠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닌 적이 있었다. 비교적 큰 몸집에 살집이 있는 그는 하늘색 폴로 티셔츠와 매우 어울리지 않았으며 거대해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그것이 어울리든 안어울리든 그 옷만 고집하였다.
그 해 초여름 나는 대학캠퍼스 안에서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하늘색 폴로티를 입은 남자무리들이 곳곳이 보였다. 이것은 흡사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처럼 그가 자가분열하여 캠퍼스 곳곳에 자신을 심어놓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르네마그리트 겨울비처럼 그들이 비가 되어 내려와 캠퍼스 곳곳에 박혀버렸는지도 몰랐다.
혼자보기 아까운 장관에 나는 감탄하며 그 무리들을 포함한 내 애인 모두가 회색양복만 입고 다니는 회색사나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더 이상 눈에 띄는 회색양복을 그만 고집하고 유니폼을 색다르게 바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계절마다 아니면 한 달 아니 일주일마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유니폼을 바꾸었을지도 몰랐다. 흡사 과티처럼 하늘색 폴로 티셔츠를 맞춰 입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그들을 보며 나의 가설이 얼추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얼마나 끔찍하고 경악스러운 일인가 생각하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회색사나이답게 담배를 쉴 새 없이 피웠다. 하지만 그는 하늘색 폴로 티셔츠 사건이후로 회색사나이로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를 회색사나이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 앞에 언제나 행동을 조심스레 하면서 지극히 정상인인 척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친구들과 있으면 장안유협 경박자로 돌변하였다. 하루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그가 여자들은 명품시계를 걸친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는 술이 들어가면 꼭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는데 그만큼 그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인사불성이 된 다음날에 자기가 어떤 일을 하였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속편한 타입이었다. 그는 술을 마신 후에 자신이 한 모든 행동들을 지우개 지우듯이 하얗게 지우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였다. 진짜로 필름이 끊겨서 잊어버린 것인지 단순히 음주동안의 행동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잊은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늘색 폴로 티셔츠를 사랑한 그는 비록 경박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지만 웃을 때만큼은 소년 같았다.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해맑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보이는 미소 때문에 계속 그와 만났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의 미소는 나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미소는 때때로 빡빡한 생활 속에 탄산수처럼 시원한 청량감을 주기도 하였다. 문득 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그와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골똘히 생각하였다.
추억을 상기시키는 동안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불을 감은 몸을 침대위에 굴리며 눈을 감았다. 그의 미소가 어떤 느낌이었는가에 대한 단어들만 떠다닐 뿐 그의 생김새도 미소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술을 마신 뒤 모든 상황을 말끔히 지우듯 내 머릿속 추억들도 그의 생김새도 지우개로 하얗게 지워진 것 같았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의 생김새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하였다. 그는 내 인생에서 떠나버린 사람이었고 더 이상 나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친구의 실종사건 이후 나를 사로잡는 회색사나이라는 주제가 그의 얼굴을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게으르게 침대 위를 뒹굴던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랍을 뒤졌다. 혹시라도 남겨놓은 그의 사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헤어지고 덤덤하게 내다버린 사진 중에 남겨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나는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다. 나는 사진에 찍히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호들갑 떨며 디지털 카메라로 쉽게 사진을 찍고 용량이 부족하면 쉽게 찍은 사진파일을 휴지통에 버리는 부류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한 나의 관점으로 볼 때 선별된 사진만으로 당시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처절한 노력 같아서 내키지가 않았다. 유난히 사진에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나를 알기에 그는 중요한 날에만 나와 사진을 찍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은 많지 않았다. 나는 그와 헤어진 후 함께 찍힌 사진들을 버리면서 양이 많지 않아서 버리기 편하다고 생각한 사실이 떠올랐다.
연달아서 그와 헤어진 이유가 그의 유학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헤어진 그는 나와 달리 명문대 학생이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공기업에 취업하기를 원하였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듯하였다. 그는 대학교 시절 학점관리에 신경을 기울었기 때문에 성적도 우수하였다. 각종대회 수상경력도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대외 활동도 활발했고 무엇보다 어학능력이 빼어났었다. 소위 요즘 말하는 고스펙을 갖춘 취업준비생이었다. 그는 당연히 공기업에 지원서를 보냈으며 일차합격 하였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공기업은 일반회사와 달리 일차 서류통과에서 지원자들을 많이 뽑고 면접에서 떨어뜨리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매우 힘들어 하였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조금 더 열심히 준비하면 공기업에 취업할 수 있다고 낙관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공기업에 최종합격이 될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도 될 수 있었다.
2년 동안 연이은 실패는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는 심리적으로 가장 친밀한 사이인 나에게 기대고자 하였다. 그와 만나면 그는 나에게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기 일쑤였다. 그는 애인이라면 응당 자기의 응석을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응석을 받아주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다만 방관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괴로워하는 일들이 나의 감정과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서운하겠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내 인생에 있어서 무료한 현실에 유희거리를 가져다주는 인물이었다.
연애는 꽤 재미있는 놀이었다.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 웃고 울며 화내며 기뻐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이었다. 아찔한 기분도 들었지만 권태로운 느낌도 들었다. 그는 따분한 일상에 변화와 이야기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 인생에 중요한 그와 헤어지고 나서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만 보아도 그는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하였다.
한때 나는 그의 하소연과 우울함이 배부른 사람의 푸념으로 들리기도 하였다. 나는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잠재적 실업자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지금이라도 공기업을 포기한다면 쉽사리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부러워서 심통을 부리고 싶었다. 스스로 만약 내가 공기업에 지원한다면 서류에서라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접근하자 한없이 비참해지고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매번 그런 기분으로 그를 대하게되자 그를 만나는 것이 이제 고역이 되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겨울이었다. 그날은 전날에 눈이 많이 내려서 거리가 빙판이 되었다. 굳이 오늘 만나야 한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남자친구만 없었다면 외출을 일절 삼갔을 것이다. 나는 겨우 짜증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집근처 카페에서 보기로 약속하였다. 집에서 카페로 가는 동안 부츠를 신은 나는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결국 언덕을 내려갈 때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넘어진 순간 하필 이런 날에 보자고 우긴 그에 대하여 원망이 솟구쳤다. 내가 아끼던 청바지와 코트는 흙으로 더러워진 빙판 때문에 흙탕물이 들었다. 청바지는 그럭저럭 입겠지만 하얀 코트는 누렇게 얼룩이 그려져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방으로 대충 코트 얼룩을 숨기고 카페로 향하였다.
카페에 도착하여 들어설 때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가 보였다. 흡연구역이 따로 마련된 카페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흡연구역을 유리벽으로 사방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유리새장에 갇힌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나는 유리새장에 유일한 탈출구인 유리문을 열고 그가 앉은 자리로 갔다. 그와 마주보며 둥그런 소파에 앉았다. 그는 담배를 끄면서 나에게 커피를 마실 것이냐고 물어왔다. 내가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다짜고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지금까지 들은 것을 합하면 300번은 족히 넘는 그의 어리광이라고 지례짐작하고 지루함에 귀를 닫아버렸다.
나는 건성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맞은편 벽화를 보았다. 키스 해링 작품을 모방한 벽화가 보였다. 벽화 속에는 키스 해링 작품처럼 마치 졸라맨을 연상시키는 노란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롤리팝 사탕같은 큰 머리에 뼈대만 보이는 졸라맨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왜냐하면 나와 마주 앉은 그와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유리벽너머 보이는 벽화 속 졸라맨은 내 위치에서 보면 그와 나란히 앉아있는 것 같았다. 피식 웃는 나를 보면서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은 것이 매우 거슬린다는 표현이었다.
나는 그를 계속 쳐다보면 계속 웃을 것만 같아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자리에는 근사한 트위드 코트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검은 트위드 코트에 금색 실이 박음질 된 모습이 매우 근사해 보였다. 마침 내가 입은 하얀색 코트의 누런 얼룩이 생각나자 하나 장만할까라는 고민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저 코트는 얼마쯤 할까. 내가 모은 용돈으로 가능하겠지’라는 생각에 한참동안 빠져있을 때였다.
“너는 구제불능 이기적인 속물이구나.”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난 듯이 들렸지만 이상하게 매우 차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퍼붓는 심한 언사에 기분이 상하였다. 황당함에 붉어진 볼을 감싸며 그를 노려보았다. 화가 가슴 속에서 머리끝까지 꾸역꾸역 밀려올라왔다. 당장이라도 너 또한 만만치 않은 속물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사실 그는 나와 못지않은 속물근성을 내비치곤 하였다. 그가 계획하는 좋은 직장과 여유로운 삶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대학교시절 풋사랑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근사한 인생계획에 나를 불청객으로 치부하였다. 종국에 그는 자신의 인생계획에서 나를 영원히 삭제시켰다. 그런 그가 내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나는 그를 방관자의 시선으로 보기로 결정하였으며 또한 그렇게 행동하였다. 이런 내가 지금에 와서 그에게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담뱃갑을 만지며 덤덤하게 앉아있었다. 화를 내는 것도 귀찮았으며 내 속마음을 말한들 바뀔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나로 인하여 바뀔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질렸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카페를 나갔다. 나는 그가 남겨놓은 담뱃갑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그는 나에게 일절 연락이 없었다. 그 뒤 그를 소개시켜 준 친구를 통해 그가 유학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정확히 그를 마지막으로 본 뒤 10일이 지나서야 그가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종된 친구와 전 애인은 모두 담뱃갑만 놓아두고 나에게서 떠나버렸다. 회색사나이들은 마지막 선물로 상대편에게 목숨만큼 귀한 담배를 주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았다. 나는 사진을 찾으러 서랍을 뒤지던 손을 다시 담뱃갑 찾기로 몰입하였다. 회색연기를 뿜으며 회색사나이들의 몸을 가려주던 담배연기가 절실해졌다. 담배를 피우면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담배를 찾는 나의 손길이 빨라졌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 그들의 마지막 심정을 알 수 있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미친 듯이 서랍을 뒤졌다. 하지만 서랍 어디에도 담뱃갑은커녕 라이터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장의 책을 모두 끄집어내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어머니에게 담배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간혹 책 사이에 끼어놓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미친 듯이 책 사이를 뒤집기 시작하였다. 어느 곳에도 담배는 보이지 않았다. 계속 화장대도 살펴보고 심지어 침대 밑도 샅샅이 살펴보았다.
방안 곳곳을 다니며 담배를 찾는 동안 문득 나는 담배를 찾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알기 싫었다. 싫은 것을 넘어서 그들의 진심이 두려웠다. 나는 그들과 진심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척 했지만 세상 어느 누구와도 소통하기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회색사나이들과 사귀었고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온 것이었다. 계속 피상적인 관계만 쌓는 것을 보고 혹자는 내가 둔해서 상대편의 마음을 기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게으르기 때문에 상대편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귀찮아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회색사나이며 피상적인 관계만을 편안해하였다. 나는 그들의 진심이 두려웠다. 지난 몇 년 동안 얌전히 지내던 그들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일시적인 변덕을 부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괴로운 자신의 처지 때문에 회색사나이로서 특성을 잠깐 잃어버렸을 것일지도 몰랐다.
3초 여대생은 실종되던 당일 자신이 아끼는 시간을 허비하며 나에게 위로받고 싶어 하였다. 나의 전 애인은 마지막 날 자신의 아쉬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였다. 그들은 시간 혹은 마음을 건네주며 나에게 무엇인가를 받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나에게 주고 나서 받기를 원하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미안했지만 한편으로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부터 우리들은 서로가 회색사나이임을 알고 있었다. 회색사나이들 관계에 대한 암묵적인 룰을 무시한 것은 저들이었다.
나는 온통 회색연기 속에 갇혀 길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실종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옛 애인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젯밤 꿈에서 생생하게 보았던 얼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겠지 생각하며 막연히 바라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생김새가 나의 인생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침 방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말이라고 방에서 뒹굴지 말고 외출이라도 해라.”
그녀의 심기 불편한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녀가 마치 나를 더러운 애벌레 보듯이 바라본 눈길이 생각났다. 나는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가 된 기분으로 화장실 세면대로 갔다. 내가 얼굴을 씻는 동안 현관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세면대 거울을 보며 눈 두 개, 코 하나를 중얼거리다가 중대한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흡사 내 뒤통수를 야구방망이로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에 멍하게 있었다. 그 순간 내 멍한 머리위로 아파트 복도를 울리는 그녀의 힐 소리가 담배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