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간호문학상 수기 당선
남자로서 그들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09-01-06 오전 09:58:16
- 김 진 효
“김 진효 간호사!” 이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다. 그렇다. 나는 ‘여성의 직업’이라는 고정 관념 속에서 예외의 1% 범위에 존재하는 남자 간호사다. 수백 년 아니 수천, 수만 년 동안 여성의 일로 여성의 신체적, 정서적 환경에 맞춰져 버린 간호의 현장에서 여자가 아닌 남자 간호사로 생활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간호사 면허증을 받고 처음 나는 내과 병동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실로 사람들의 고정 관념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어, 어, 저기 주사는 간호사가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 예. 저도 간호삽니다. 남자 간호사요.”라며 하나하나 설명을 해야 함은 물론 자칫 내가 놓은 주사를 환자들이 조금 더 아프다고 느끼기라도 하는 날엔 “다시는 선생님에게 주사 안 맞을 거예요!”라고 비난의 화살이 내 심장 깊숙이에 박히는 등, 고난의 순간들이 되풀이 되곤 하였다. 심지어,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나를 간호사라고 인정조차 하지 않으셨다. “허허 장난하지 말고 간호사 오라고 해!”, “아 예 어르신 제가 담당 간호사라니까요. 여기 보세요(신분증을 가리키며). 김 진효 간호사라고 써 있잖아요.”,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아무튼 남자 말고 간호사 오라고 하라니까!”…….
이미 어르신들에게 간호사는 여자이어야만 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는 간호사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나는 직접, 간접 간호 시간외에 남자 간호사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부가의 간호 시간이 필요했고 그런 나의 핸디캡은 나의 간호사 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로 다가 오고 있었다. ‘아 나는 정녕 간호사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어 갈 때 즈음 나에게 일반병동이 아닌 정신과 병동으로의 전환 근무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학부 시절 잠시 동안의 실습 경험 속에 ‘정신과’란 나에게 ‘아주 특별하고 이상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잡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간호학을 공부하기 전 철학을 전공했던 나에겐 또 하나의 관심과 호기심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환자들과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비판 없이 들어주고, 가끔은 짧은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들에게 작은 치료적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곳! 작게는 환자들의 어깨를 감싸 쥐고 그들과 공감하고 울어 줄 수도 있으며 크게는 환자들에게 하나의 성숙된 사회인으로서의 roll model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그런 매력적인 곳! 그렇게 새로운 기대와 다짐 속에 나에게 정신과 간호사로서의 새로운 간호사 생활은 시작 되었다.
정신과 간호사에게는 제1순위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환자와 간호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이와 역전이이다. 교과서에서 그것은 치료적인 관계를 그르치는 제1의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것으로 실제로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내가 처음 정신과 근무를 할 때 병동에서 가장 중한 환자는 양극성장애를 진단받은 20대 초반의 여자 환자였다. 그 환자는 하루 24시간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치료진에게 요구와 협박, 회유, 한탄, 폭언 등을 하곤 했다. “참 선생님 뭐 제가 사실 지금 이렇게 안 좋아서 입원해 있지만 사실 가수 지훈 오빠가 제 남자 친구예요.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훈 오빠가 날 좋다고 막 연락하고 그러지만 제가 사실 요즘은 조금 실증이 나서 만나고 있지 않지만요. 그런데 제가 선생님 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요? 그러니까 절 어떻게 해서 사귀어 보려는 생각 꿈도 꾸지 마세요! 아 참나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네!”라는 일방적인 이야기를 그 환자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나에게 던지고 돌아가곤 하였다. 솔직히 이야기 하면 처음 난 그 환자가 정말 싫었다. 교과서에서 환자에게 ‘역전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안 된다.’ 수도 없이 배웠지만 나도 간호사이고 치료진이기 이전에 한명의 사람이기 때문에 억누를 수 없는 본능처럼 간호사로서는 들어서는 안 될 그런 미움의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역전이로 인해 혼란스러워 할 때 즈음 당시 우리병동 수간호사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김 진효 선생님 정신과에서는 제일 먼저 나를 알고 다스릴 줄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간호사가 먼저 힘들어 지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환자들을 치료적으로 돌볼 수 없게 된단 말이야…….” 사실 그랬다. 일반 간호의 현장에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 플러스, 알파, 즉 간호사로서의 기술과 거기에 한 명의 간호사로서 자기만의 간호철학을 가진 간호가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간호사 그 자체가 치료적인 도구이고 또한 상황 상황에 맞는 접근이 곧 중요한 치료적인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유연성 있는 대처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아! 나는 지금 간호사로서 더 많은 것을 버려야겠구나, 내 마음속에 가득 찬 편견과 고집스러움, 간호사가 아닌 한명의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존심을 먼저 버려야만 그것을 버리고 남은 공간에 나의 환자들의 아픔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구나!’라고 나는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이후 나는 곧장 근무를 쉬는 날에 맞추어 평소 나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던 낚시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낚시는 흔히 낚시꾼들이 목표로 삼는 대물을 만나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고 반드시 물고기를 잡기위한 낚시도 아닌‘나를 비우기 위한 낚시’였다. 넓은 바다와 마주 하고서는 한 주걱 한 주걱 밑밥을 던지며 조류를 따라 흐르는 밑밥 속에 나 자신이 33년 동안 가지고 있던 사람, 그리고 사회에 대한 고정 관념들을 함께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결코 환자들을 내 기준에 맞추어 보지 않으리라!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눈높이에서 지금 그들이 힘들어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풀어 가리라!’
이렇게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정신과 간호사로서 모습을 조금씩 갖추어 가게 될 무렵 나의 환자이자 나의 스승이 된 한 명의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정신분열병을 진단받은 여고생이었다. 학교생활 중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힘들어하다, 술과 담배를 배우게 되었고, 술과 담배로 인해 우리 사회 속에서 ‘문제아’라는 낙인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일탈의 본능인 id와 그 친구가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선함인 super ego와의 갈등 속에서 점점 몸과 마음은 황폐해져 가고, 이러한 갈등과 혼란으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인가 ‘죽어라! 죽어라! 너는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라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친구들이 ‘돼지야! 이 돼지야!’라는 환청으로 인해 음식을 먹고 난 후 토하는 증상까지 보였고, 급기야 악몽으로 인해 하루 수면 량이 2시간이 되지 못하는 매우 힘든 상황에 있는 친구였다.
정신과 보호병동에 입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 친구 역시 입원 당시 입원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었다. 그 친구가 입원 하던 날. 지친 그 친구의 등 뒤로 보호병동의 육중한 문이 ‘쾅’하고 닫히자, 그 친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화장실로 들어가서는 문을 잠그고 입원하지 않겠다며 30분 이상을 엉엉 우는 것이었다. 이럴 때 우리들이 선택하는 최선의 manage는 환자가 진정할 수 있을 때 까지 인내를 가지고 거리를 둔 상태로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보호자들에게 혹, 부모님들이 TV에서 보신 그런 무서운 정신병원은 아니라는 설명과 충분한 정서적 지지를 한 후 정신과 병동에 대한 안내와 설명을 드리고 보호자들을 먼저 돌려보낸다. 그러면 늘 보호자들은 십중팔구 역시나 불안한 마음을 눈빛에 숨기지 못하고 “제발 잘 부탁 드려요.”라며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며 돌아간다. 그날도 역시 동일한 절차는 재현 되었다.
30분 이상을 울고 나온 그 친구는 불안한 눈초리로 병실 앞을 기웃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날 역시 내가 먼저 유머러스하게 다가갔다. “다 울었니? 좀 더 울어도 되는데 어제 퇴원한 어떤 언니는 너처럼 하도 울다가 10년 전에 수술한 쌍꺼풀이 풀려서 리콜 받으러 갔다던데” 그 친구는 울다가 그만 입가에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얼른 환자복 갈아입으세요. 저녁 먹을 때 됐으니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그 친구와 rapport가 형성되었음을 직감한 나는 삼촌처럼 조용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여기 병원이야. 비록 문은 굳게 닫혀 있어도 아픈 사람들이 왔다가 치료받고 다시 건강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병원이라고 봐봐 네가 입고 있는 환자복에도 써 있잖아 건국대학교병원이라고…….”그렇게 지금 나의 스승이 된 그 친구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병원을 만약 가정에다 비유한다면 간호사는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 거의 모든 생활을 간호사가 보살펴 봐 주어야 하는 정신과병동에서는 더더욱 이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루 세 번 양치질에서부터 식사 때 편식을 하는지, 병동 식구들이랑 잘 어울리고 있는 지, 김치 국물이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지는 않은지, 늦잠을 자지는 않는지……. 하나하나 모두 열거 하자고 하면 끝이 없을 정도로 ‘간호사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은 많다.
모든 가정에서의 엄마가 그렇듯 잔소리로 대표되는 엄마는 역시 병원에서도 환자들에게 인기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엄마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듣기 싫은 사랑의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꿋꿋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이렇게 잔소리를 하다보면 반항하는 자식도 있고, 또 반성하고 엄마의 잔소리를 흡수하는 자식들도 있는 것처럼 병원에서도 환자들의 특성에 따라 잘 따라오는 환자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하는 환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 친구는 그런 분류에서 볼 때 언제나 ‘남자 엄마’의 잔소리를 쏙쏙 잘 흡수해 주는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는 꼭 내가 밤 근무를 할 때면 새벽 4시에 일어나곤 했다. 만약 내가 정석대로 일을 수행하는 간호사라면 다시 수면을 격려하고 수면에 최적한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둥글레차 한잔을 늘 들고 그 아이와 면담을 했다. (사실 그 아이는 커피를 무척 좋아 했으나 좋은 수면양상이 중요한 치료인 정신과에서 카페인이 든 커피는 하루 한잔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커피는 줄 수 없었다.) 그 시간만큼은 난 늘 잔소리 쟁이 엄마이고 싶지 않았고 자식을 이해해 주는 따듯한 엄마이고 싶었다. 의사소통 기술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empathy’가 무슨 뜻인가? 내가 아닌 상대방의 옷과, 상대방의 이름표를 달고 상대방의 가슴속에서 생각하고 이야기 하는 것 아닌가?
한번 두 번……. 그렇게 내가 새벽마다 그 친구에게 비판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따듯한 엄마가 되어주고, 그 친구 역시 엄마에게 꾸지람을 들을 걱정 없이 자신의 지난 이야기들을 털어 놓고 때론 눈물을 흘려가는 시간이 반복되어가며 어느덧 우리 모녀가 마신 둥글레차의 빈 종이컵이 제법 많이 쌓여 갈 무렵, 그 친구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던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친구들로 인해 얽혀 버린 한 부분’, ‘자신 스스로의 정체성 속에서 혼란에 휩싸여 얽혀 버린 한 부분’,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약한 한 아이로서 자신의 역할과 기대를 모두 수용하지 못해 얽혀 버린 한 부분…….’ 그렇게 그 친구는 자기 자신도 결코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자기 가슴속의 얽혀있던 실타래를 스스로 풀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내가 그 친구에게 해 준 것 이라고는 고작 내가 아닌 그 친구의 옷과 이름표를 달고 그 친구의 가슴속에서 그 친구를 바라 본 것 뿐 이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그 친구의 모습으로 보며 나 역시 수백 페이지가 넘는 교과서에서도 차마 깨닫지 못했던 부족한‘간호사 엄마’로서의 모습을 배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간이 흘러 그날은 그 친구가 호전되어 퇴원을 얼마 앞두지 않은 때였다. 그날 나는 밤 근무였고 어김없이 그 아이는 새벽 4시경에 일어났다. 그날 역시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둥글레차를 한잔씩 들고 동그란 병동 휴게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내심 이제는 그 친구와의 치료적 관계에서 간호학자 로저스가 이야기 한 ‘종결’ 단계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 할 때쯤이었다. 그 친구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정신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왜 사람들은 정신과 환자를 보고 미쳤다고들 하잖아요. 선생님은 뭐라고 생각 하시는데요?” 사실 그랬다. 비록 내가 정신과에서 매일 정신과 환자들을 대하는 간호사였지만 정신과 질환이 무엇인지 의학적 정의가 아닌 한 인간인 간호사로서의 그 정의를 나의 간호 철학과 결합하여 정립해 놓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넌 뭐라고 생각 하는데?”내가 되물었다. “그냥 뭐 잘은 모르지만 우리들도 다 아픈 거니까 병이겠지요. 마음의 병? 아직 그 아픈 마음이 얼마나 열이 나는지 측정 할 수 있는 체온계도 개발 되지 않았을 뿐이고, 또 마음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찍어 볼 수 있는 X-ray도 개발 되지 않아서 그냥 사람들이 이상한 병이라고 하는 마음의 병이 아닐까요? 에이 선생님한테 제가 물어 봤는데 저에게 답을 하라고 하면 어떡해요! 엄마처럼 잔소리만 하지 말고 공부하세요! 공부! 호호호……. ”
그날 그 친구는 그렇게 나에게 커다란 숙제와 가르침을 남기고 얼마 후 밝은 모습으로 퇴원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그 친구가 외래를 오면서 따듯한 캔커피를 사들고 ‘남자 엄마’를 찾아 병동에 들렀다. “선생님 저 이제 곧 수능 봐요. 전 사회 복지학과 가고 싶은 데 제가 가고 싶은 학교에 가려면 약간 운이 따라 주어야 될 것 같기도 해요. 모의고사 점수가 간당간당 하거든요. 호호호”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리 수험생을 둔 엄마의 마음처럼 내가 긴장되고 걱정되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며 기도를 하는 심정이었는지 모르겠다. 순간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지금 저 친구가 수능을 치르고 멋진 대학생이 되어 공부하고, 훌륭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 사람의 아내로서, 한 아이의 훌륭한 엄마로서 다시 저 친구의 소식을 우연치 않게나마 듣게 된다면 나는 지금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날……. 아직 따듯함의 온기가 양손에 전해지는 커피 캔을 내손에 꼭 쥐어주며 뒤돌아서 가는 그 친구를 보며 나는 이런 결심을 했다. ‘나는 우리 환자들의 어머니가 되어야한다!’ 그들의 어머니가 되어 때론 씻기 싫어하는 이들에게 씻으라고 잔소리를 해야 하고, 먹기 싫어하는 이들에겐 편식하는 어린아이 달래듯 생선가시를 손으로 발려 먹여 줄 수 있어야 하고, 빨래는 하는지 살피고 그들의 속옷을 손으로 빨아 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남들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인해 ‘이상한 사람들’이라며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며 우리 사회의 울타리 속에서 내몰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픈 사람들’이라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한다고…….
그 친구가 남기고 간 숙제의 답처럼 정신질환이란, 그 친구의 말처럼 ‘마음의 병’일 뿐이며 그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속에 조금 풀어내기 어려운 엉켜버린 실타래를 하나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일반병동의 환자들이 아파서 기침을 하고 피가 나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이상한 그들의 모습은 기침과 같은 하나의 증상일 뿐이라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질병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 될 수 있지만 그들의 병은 전파 되지도 않고 혼자만 안고 사는 착한 병이라고……. 그들은 이 세상 어느 병원 어떤 환자들 보다 맑고 순수한 사람들이라고……. 그런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은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게 도와주어 풀어낸 그 실로 스스로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오늘도 나의 2평 남짓 작은 자취방에서 3교대에 지친 몸을 3개의 알림 시계 소리를 들으며 낮번 출근을 위해 단잠을 깬다. 겨우 졸린 눈을 비비며 병원으로 향하는 걸음을 내딛으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해본다.
‘저마다 가슴속에 얽혀버린 실타래를 하나씩 품고 사는 우리 병동의 환자들 …….
나는 오늘도
그들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는
훌륭한 그들의 남자 어머니가 될 거라고…….’
“김 진효 간호사!” 이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다. 그렇다. 나는 ‘여성의 직업’이라는 고정 관념 속에서 예외의 1% 범위에 존재하는 남자 간호사다. 수백 년 아니 수천, 수만 년 동안 여성의 일로 여성의 신체적, 정서적 환경에 맞춰져 버린 간호의 현장에서 여자가 아닌 남자 간호사로 생활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간호사 면허증을 받고 처음 나는 내과 병동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실로 사람들의 고정 관념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어, 어, 저기 주사는 간호사가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 예. 저도 간호삽니다. 남자 간호사요.”라며 하나하나 설명을 해야 함은 물론 자칫 내가 놓은 주사를 환자들이 조금 더 아프다고 느끼기라도 하는 날엔 “다시는 선생님에게 주사 안 맞을 거예요!”라고 비난의 화살이 내 심장 깊숙이에 박히는 등, 고난의 순간들이 되풀이 되곤 하였다. 심지어,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나를 간호사라고 인정조차 하지 않으셨다. “허허 장난하지 말고 간호사 오라고 해!”, “아 예 어르신 제가 담당 간호사라니까요. 여기 보세요(신분증을 가리키며). 김 진효 간호사라고 써 있잖아요.”,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아무튼 남자 말고 간호사 오라고 하라니까!”…….
이미 어르신들에게 간호사는 여자이어야만 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는 간호사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나는 직접, 간접 간호 시간외에 남자 간호사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부가의 간호 시간이 필요했고 그런 나의 핸디캡은 나의 간호사 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로 다가 오고 있었다. ‘아 나는 정녕 간호사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어 갈 때 즈음 나에게 일반병동이 아닌 정신과 병동으로의 전환 근무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학부 시절 잠시 동안의 실습 경험 속에 ‘정신과’란 나에게 ‘아주 특별하고 이상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잡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간호학을 공부하기 전 철학을 전공했던 나에겐 또 하나의 관심과 호기심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환자들과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비판 없이 들어주고, 가끔은 짧은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들에게 작은 치료적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곳! 작게는 환자들의 어깨를 감싸 쥐고 그들과 공감하고 울어 줄 수도 있으며 크게는 환자들에게 하나의 성숙된 사회인으로서의 roll model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그런 매력적인 곳! 그렇게 새로운 기대와 다짐 속에 나에게 정신과 간호사로서의 새로운 간호사 생활은 시작 되었다.
정신과 간호사에게는 제1순위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환자와 간호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이와 역전이이다. 교과서에서 그것은 치료적인 관계를 그르치는 제1의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것으로 실제로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내가 처음 정신과 근무를 할 때 병동에서 가장 중한 환자는 양극성장애를 진단받은 20대 초반의 여자 환자였다. 그 환자는 하루 24시간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치료진에게 요구와 협박, 회유, 한탄, 폭언 등을 하곤 했다. “참 선생님 뭐 제가 사실 지금 이렇게 안 좋아서 입원해 있지만 사실 가수 지훈 오빠가 제 남자 친구예요.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훈 오빠가 날 좋다고 막 연락하고 그러지만 제가 사실 요즘은 조금 실증이 나서 만나고 있지 않지만요. 그런데 제가 선생님 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요? 그러니까 절 어떻게 해서 사귀어 보려는 생각 꿈도 꾸지 마세요! 아 참나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네!”라는 일방적인 이야기를 그 환자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나에게 던지고 돌아가곤 하였다. 솔직히 이야기 하면 처음 난 그 환자가 정말 싫었다. 교과서에서 환자에게 ‘역전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안 된다.’ 수도 없이 배웠지만 나도 간호사이고 치료진이기 이전에 한명의 사람이기 때문에 억누를 수 없는 본능처럼 간호사로서는 들어서는 안 될 그런 미움의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역전이로 인해 혼란스러워 할 때 즈음 당시 우리병동 수간호사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김 진효 선생님 정신과에서는 제일 먼저 나를 알고 다스릴 줄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간호사가 먼저 힘들어 지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환자들을 치료적으로 돌볼 수 없게 된단 말이야…….” 사실 그랬다. 일반 간호의 현장에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 플러스, 알파, 즉 간호사로서의 기술과 거기에 한 명의 간호사로서 자기만의 간호철학을 가진 간호가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간호사 그 자체가 치료적인 도구이고 또한 상황 상황에 맞는 접근이 곧 중요한 치료적인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유연성 있는 대처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아! 나는 지금 간호사로서 더 많은 것을 버려야겠구나, 내 마음속에 가득 찬 편견과 고집스러움, 간호사가 아닌 한명의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존심을 먼저 버려야만 그것을 버리고 남은 공간에 나의 환자들의 아픔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구나!’라고 나는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이후 나는 곧장 근무를 쉬는 날에 맞추어 평소 나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던 낚시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낚시는 흔히 낚시꾼들이 목표로 삼는 대물을 만나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고 반드시 물고기를 잡기위한 낚시도 아닌‘나를 비우기 위한 낚시’였다. 넓은 바다와 마주 하고서는 한 주걱 한 주걱 밑밥을 던지며 조류를 따라 흐르는 밑밥 속에 나 자신이 33년 동안 가지고 있던 사람, 그리고 사회에 대한 고정 관념들을 함께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결코 환자들을 내 기준에 맞추어 보지 않으리라!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눈높이에서 지금 그들이 힘들어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풀어 가리라!’
이렇게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정신과 간호사로서 모습을 조금씩 갖추어 가게 될 무렵 나의 환자이자 나의 스승이 된 한 명의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정신분열병을 진단받은 여고생이었다. 학교생활 중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힘들어하다, 술과 담배를 배우게 되었고, 술과 담배로 인해 우리 사회 속에서 ‘문제아’라는 낙인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일탈의 본능인 id와 그 친구가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선함인 super ego와의 갈등 속에서 점점 몸과 마음은 황폐해져 가고, 이러한 갈등과 혼란으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인가 ‘죽어라! 죽어라! 너는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라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친구들이 ‘돼지야! 이 돼지야!’라는 환청으로 인해 음식을 먹고 난 후 토하는 증상까지 보였고, 급기야 악몽으로 인해 하루 수면 량이 2시간이 되지 못하는 매우 힘든 상황에 있는 친구였다.
정신과 보호병동에 입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 친구 역시 입원 당시 입원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었다. 그 친구가 입원 하던 날. 지친 그 친구의 등 뒤로 보호병동의 육중한 문이 ‘쾅’하고 닫히자, 그 친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화장실로 들어가서는 문을 잠그고 입원하지 않겠다며 30분 이상을 엉엉 우는 것이었다. 이럴 때 우리들이 선택하는 최선의 manage는 환자가 진정할 수 있을 때 까지 인내를 가지고 거리를 둔 상태로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보호자들에게 혹, 부모님들이 TV에서 보신 그런 무서운 정신병원은 아니라는 설명과 충분한 정서적 지지를 한 후 정신과 병동에 대한 안내와 설명을 드리고 보호자들을 먼저 돌려보낸다. 그러면 늘 보호자들은 십중팔구 역시나 불안한 마음을 눈빛에 숨기지 못하고 “제발 잘 부탁 드려요.”라며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며 돌아간다. 그날도 역시 동일한 절차는 재현 되었다.
30분 이상을 울고 나온 그 친구는 불안한 눈초리로 병실 앞을 기웃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날 역시 내가 먼저 유머러스하게 다가갔다. “다 울었니? 좀 더 울어도 되는데 어제 퇴원한 어떤 언니는 너처럼 하도 울다가 10년 전에 수술한 쌍꺼풀이 풀려서 리콜 받으러 갔다던데” 그 친구는 울다가 그만 입가에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얼른 환자복 갈아입으세요. 저녁 먹을 때 됐으니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그 친구와 rapport가 형성되었음을 직감한 나는 삼촌처럼 조용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여기 병원이야. 비록 문은 굳게 닫혀 있어도 아픈 사람들이 왔다가 치료받고 다시 건강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병원이라고 봐봐 네가 입고 있는 환자복에도 써 있잖아 건국대학교병원이라고…….”그렇게 지금 나의 스승이 된 그 친구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병원을 만약 가정에다 비유한다면 간호사는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 거의 모든 생활을 간호사가 보살펴 봐 주어야 하는 정신과병동에서는 더더욱 이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루 세 번 양치질에서부터 식사 때 편식을 하는지, 병동 식구들이랑 잘 어울리고 있는 지, 김치 국물이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지는 않은지, 늦잠을 자지는 않는지……. 하나하나 모두 열거 하자고 하면 끝이 없을 정도로 ‘간호사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은 많다.
모든 가정에서의 엄마가 그렇듯 잔소리로 대표되는 엄마는 역시 병원에서도 환자들에게 인기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엄마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듣기 싫은 사랑의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꿋꿋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이렇게 잔소리를 하다보면 반항하는 자식도 있고, 또 반성하고 엄마의 잔소리를 흡수하는 자식들도 있는 것처럼 병원에서도 환자들의 특성에 따라 잘 따라오는 환자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하는 환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 친구는 그런 분류에서 볼 때 언제나 ‘남자 엄마’의 잔소리를 쏙쏙 잘 흡수해 주는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는 꼭 내가 밤 근무를 할 때면 새벽 4시에 일어나곤 했다. 만약 내가 정석대로 일을 수행하는 간호사라면 다시 수면을 격려하고 수면에 최적한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둥글레차 한잔을 늘 들고 그 아이와 면담을 했다. (사실 그 아이는 커피를 무척 좋아 했으나 좋은 수면양상이 중요한 치료인 정신과에서 카페인이 든 커피는 하루 한잔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커피는 줄 수 없었다.) 그 시간만큼은 난 늘 잔소리 쟁이 엄마이고 싶지 않았고 자식을 이해해 주는 따듯한 엄마이고 싶었다. 의사소통 기술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empathy’가 무슨 뜻인가? 내가 아닌 상대방의 옷과, 상대방의 이름표를 달고 상대방의 가슴속에서 생각하고 이야기 하는 것 아닌가?
한번 두 번……. 그렇게 내가 새벽마다 그 친구에게 비판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따듯한 엄마가 되어주고, 그 친구 역시 엄마에게 꾸지람을 들을 걱정 없이 자신의 지난 이야기들을 털어 놓고 때론 눈물을 흘려가는 시간이 반복되어가며 어느덧 우리 모녀가 마신 둥글레차의 빈 종이컵이 제법 많이 쌓여 갈 무렵, 그 친구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던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친구들로 인해 얽혀 버린 한 부분’, ‘자신 스스로의 정체성 속에서 혼란에 휩싸여 얽혀 버린 한 부분’,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약한 한 아이로서 자신의 역할과 기대를 모두 수용하지 못해 얽혀 버린 한 부분…….’ 그렇게 그 친구는 자기 자신도 결코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자기 가슴속의 얽혀있던 실타래를 스스로 풀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내가 그 친구에게 해 준 것 이라고는 고작 내가 아닌 그 친구의 옷과 이름표를 달고 그 친구의 가슴속에서 그 친구를 바라 본 것 뿐 이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그 친구의 모습으로 보며 나 역시 수백 페이지가 넘는 교과서에서도 차마 깨닫지 못했던 부족한‘간호사 엄마’로서의 모습을 배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간이 흘러 그날은 그 친구가 호전되어 퇴원을 얼마 앞두지 않은 때였다. 그날 나는 밤 근무였고 어김없이 그 아이는 새벽 4시경에 일어났다. 그날 역시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둥글레차를 한잔씩 들고 동그란 병동 휴게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내심 이제는 그 친구와의 치료적 관계에서 간호학자 로저스가 이야기 한 ‘종결’ 단계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 할 때쯤이었다. 그 친구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정신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왜 사람들은 정신과 환자를 보고 미쳤다고들 하잖아요. 선생님은 뭐라고 생각 하시는데요?” 사실 그랬다. 비록 내가 정신과에서 매일 정신과 환자들을 대하는 간호사였지만 정신과 질환이 무엇인지 의학적 정의가 아닌 한 인간인 간호사로서의 그 정의를 나의 간호 철학과 결합하여 정립해 놓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넌 뭐라고 생각 하는데?”내가 되물었다. “그냥 뭐 잘은 모르지만 우리들도 다 아픈 거니까 병이겠지요. 마음의 병? 아직 그 아픈 마음이 얼마나 열이 나는지 측정 할 수 있는 체온계도 개발 되지 않았을 뿐이고, 또 마음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찍어 볼 수 있는 X-ray도 개발 되지 않아서 그냥 사람들이 이상한 병이라고 하는 마음의 병이 아닐까요? 에이 선생님한테 제가 물어 봤는데 저에게 답을 하라고 하면 어떡해요! 엄마처럼 잔소리만 하지 말고 공부하세요! 공부! 호호호……. ”
그날 그 친구는 그렇게 나에게 커다란 숙제와 가르침을 남기고 얼마 후 밝은 모습으로 퇴원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그 친구가 외래를 오면서 따듯한 캔커피를 사들고 ‘남자 엄마’를 찾아 병동에 들렀다. “선생님 저 이제 곧 수능 봐요. 전 사회 복지학과 가고 싶은 데 제가 가고 싶은 학교에 가려면 약간 운이 따라 주어야 될 것 같기도 해요. 모의고사 점수가 간당간당 하거든요. 호호호”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리 수험생을 둔 엄마의 마음처럼 내가 긴장되고 걱정되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며 기도를 하는 심정이었는지 모르겠다. 순간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지금 저 친구가 수능을 치르고 멋진 대학생이 되어 공부하고, 훌륭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 사람의 아내로서, 한 아이의 훌륭한 엄마로서 다시 저 친구의 소식을 우연치 않게나마 듣게 된다면 나는 지금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날……. 아직 따듯함의 온기가 양손에 전해지는 커피 캔을 내손에 꼭 쥐어주며 뒤돌아서 가는 그 친구를 보며 나는 이런 결심을 했다. ‘나는 우리 환자들의 어머니가 되어야한다!’ 그들의 어머니가 되어 때론 씻기 싫어하는 이들에게 씻으라고 잔소리를 해야 하고, 먹기 싫어하는 이들에겐 편식하는 어린아이 달래듯 생선가시를 손으로 발려 먹여 줄 수 있어야 하고, 빨래는 하는지 살피고 그들의 속옷을 손으로 빨아 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남들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인해 ‘이상한 사람들’이라며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며 우리 사회의 울타리 속에서 내몰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픈 사람들’이라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한다고…….
그 친구가 남기고 간 숙제의 답처럼 정신질환이란, 그 친구의 말처럼 ‘마음의 병’일 뿐이며 그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속에 조금 풀어내기 어려운 엉켜버린 실타래를 하나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일반병동의 환자들이 아파서 기침을 하고 피가 나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이상한 그들의 모습은 기침과 같은 하나의 증상일 뿐이라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질병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 될 수 있지만 그들의 병은 전파 되지도 않고 혼자만 안고 사는 착한 병이라고……. 그들은 이 세상 어느 병원 어떤 환자들 보다 맑고 순수한 사람들이라고……. 그런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은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게 도와주어 풀어낸 그 실로 스스로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오늘도 나의 2평 남짓 작은 자취방에서 3교대에 지친 몸을 3개의 알림 시계 소리를 들으며 낮번 출근을 위해 단잠을 깬다. 겨우 졸린 눈을 비비며 병원으로 향하는 걸음을 내딛으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해본다.
‘저마다 가슴속에 얽혀버린 실타래를 하나씩 품고 사는 우리 병동의 환자들 …….
나는 오늘도
그들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는
훌륭한 그들의 남자 어머니가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