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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간호문학상 수기 가작
껌과 찹쌀한말의 의미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09-01-06 오전 09:56:06
- 고 영 옥
추석날 아침 칠남매의 막내로 시집간 명절의 분주함속에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많은 식구의 매끼 식사와 명절준비를 하고 뒷정리를 해야하는 우리 며느리들의 명절 아침은 그냥의 아침이 아니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서 난 앞치마 속에서 수줍은 새색시 마냥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핸드폰을 여러차례 만지작 거리고 열어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요란하게 진동이 울린다. “선상님 나 전주 늙은이요 맹일은 잘 지내고 있소 ” 맛깔스런 전라도 사투리의 할아버지는 나의 안부를 묻는다. “어머 어르신 별일 없으셨어요 ?” 기다림이 티나지 않게 내가 조심스럽게 그리고 반갑게 대답한다. “나야 늘 그렇치라우 맨 하는 일이 그것잉께” 올해도 건강하고 우리 선생님이라 명절에 인사차 전화했다며 늘 하시는 말씀으로 밥 거르지 말고 운전할 때 조심하며 다니라고 하신다.
전주 할아버지와의 통화가 끝난 나의 가슴이 훈훈해진다. 어린시절 잠자기 싫어 괜히 투정부리는 내 등허리를 말없이 쓸어주시던 외할머니의 느낌 같기도 하고 서울에서의 긴 타향살이중에 간간이만 맛볼 수 있었던 엄마의 청국장맛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의 소중한 껌과 찹쌀 한말의 의미를 기억해 내본다.
가정간호팀으로 자리를 옮긴지 한 일년쯤 지난 어느 날 전주할아버지를 처음 뵈었을 때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마른체구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는 그렇지 않아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모습에 더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큰 미소를 지으며 반가와 하는 내 얼굴을 무색하게 표정없이 대충 쳐다보시는 모습과 너무도 짧게 끝나던 대답들.
내가 하는 일이나 완벽하게 실수하지 말고 잘 하라는 식의 전주할아버지의 태도가 너무도 불쾌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난 환자를 간호하기 위해 간 간호사가 아닌가 .....속이 상했지만 난 잘 참아내 가고 있었다.
“어르신 오늘은 기관지관을 교체했고, 콧줄(위관영양)은 다음주에 교체해 드릴거예요.” 최대한 부드러움과 예의를 갖추며 이야기하는 나에게 전주할아버지는 찬물을 확 끼얹는다. “목 소독한 거즈는 이렇코롬 허고 콧줄 반창고는 꼭 이렇게만 난 부칭께로 인자 우리집 와서는 간호사 양반도 그렇게 해주씨요.”하며 내가 소독햇던 거즈를 맨손으로 만지작 거리시고 위관영양 튜브의 고정 테이프 부치는 시범을 나에게 보이신다. 누가 간호사고 누가 환자보호자인지 잠시 어리둥절해 지는 순간이었다. 이쯤되니 나도 슬슬 기분이 상했지만 끝까지 참고 또 참으며 한마디를 했다 “보호자분 소독한 부위를 그렇게 맨손으로 만지시면 안되는데.....”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내게 할아버지는 일침을 한방 세게 놓아준다. “내가 맨 년을 이렇코롬 혀도 암 이상도 없었고 우리 할마씨는 내가 지일 잘 앙께 내 말디로 해주씨요”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아무 잘못도 없는 나의 폐배로 끝이 났다.
난 할아버지가 너무 싫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허공만 바라보는 환자인 할머님께 너무도 정성껏 대하시는 모습은 그 모습만은 너무도 좋았다. 아니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그냥 내 마음이 좋고 할아버지에 대한 비호감이 바로 호감으로 바뀔 수 있었던 건 내가 간호사이기 때문이리라.....
나와 할아버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나의 인내는 끈기를 낳았고 끈기는 이상하게 할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있음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너무 말씀이 없으셔서 할머니 간호보다 할아버지 눈치를 더 살핀 적도 있었고 어떤 날은 너무 기분이 좋으셔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쓸쩍슬쩍 꺼내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자식 때문에 어떤 날은 며느리 때문에 어떤 날은 호전도 없이 이렇게 누워만 계시는 할머니 때문에 우울해하시고 외로워하시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나와 두분과의 관계도 인연이라는 단어로 어느 정도는 묶여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가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 정도를 늦게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너무도 정확한 분이시라 될 수 있으면 시간약속을 잘 지키는 편인데 그날은 모든 일이 다 꼬였다) 전주 할아버지가 먼저 뭐라 하신 것도 아닌데 겁먹고 졸음 운전했던 차가 다른 차와 부딪쳐서 도로가 막혔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들어가는데 내 예상대로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신다.
늘 화난 표정이시기도 하고 할아버지를 이제는 누구보다 안다고 나름으로 자부하고 있던 터라 말없이 듣고 있는데 계속 듣고 있자니 그건 호통이 아니고 걱정을 소리 질러 해대고 계시는 거였다.
내가 아주 죄송해 하며 말한다 “걱정하셨어요? 죄송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뜬금없는 질문을 하신다 “운전하고 댕기믄 졸리기도 허고 그런당가 ” “그럴떄도 있기는 하는데 졸리면서까지 운전 많이 하고 다닐 정도는 아니닌까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가 이제는 조용한 소리로 대답하신다 “난 우리 고선상 안와갔고 뭔 일이 생겼는가 걱정이 되야서 저 큰길까정 나갔다가 혹시 딴길로 들어왔는가 싶어가꼬 지금 막 부랴부랴 들어오고 있는 길이당께” 말씀하시는 얼굴을 자세히 뵈니 이마에 땀이 맺혀 있다. 가슴이 봄비에 푹 젖는 느낌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별거 아닌 일에 감사할 떄가 더 많고 별거 아닌 어떤 이유가 삶을 지키게도 도와주고 정말 별거 아닌 일에 뜨거운 눈물을 보이게도 되는 것 같다.
할아버지와 가정간호사의 정성 안에서도 할머니의 병세는 호전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주치의가 예상했던 것처럼 나빠지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도 별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고 나도 할머니가 그렇게 그 침대에서 할아버지 곁을 지켜주심이 감사했다.
.
어느 날 할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잠깐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주문을 하셨다.(별로 나에게 부탁하시지도 않고 늘 바쁜 나를 걱정해서 혹 침상이라도 같이 정리해드릴라 치면 그것까지도 미안해 하시던 분이라 그날은 의아했다.) 그러시면서 할아버지의 인생을 고해하시듯 나에게 털어놓으신다. 젊은 시절 집안일은 돌보지도 않고 밖으로만 돌았다고, 그래서 할머니와 자식들이 고생이 많았다고, 사실 늙어서 할머니가 먼저 저렇게 쓰러진걸 보니 저 누운 자리가 당신 자리인 것 같아 더 미안하다고, 이제는 속죄하는 맘으로 잘해주고 싶다고, 죽는 날까지 편하게 해주다가 같이 저 세상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불혹도 안 된 나에게 희수의 노인이 눈물을 가득 담고 말씀을 하신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씩 내려가 밭도 보고 논도 돌보았는데 이젠 나이도 많이 먹고 할머니 간호하시기에도 버거워서 올해로 농사도 끝내고 다른집에 맡겨야겠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내내 쓸쓸해 하신다. 이젠 나에겐 마른 체구의 할아버지 얼굴도 신경질인 모습도 툭 불거져 나온 광대뼈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때처럼 난 아무것도 모르고 허공만 응시하는 할머니에게 뭐라뭐라 계속 이야기를 들려 드리면서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할아버지의 모습이 이상하게 분주하게 느껴졌다. 꼭 할말을 다 못하신 듯 자꾸 내 눈치만 보신다.
“잉 다 끝나거여.. ” 하시면서 주섬주섬 나의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나가신다.(늘 할아버지는 일이 끝난 나의 방문가방을 현관까지 가져다 주셨다.)
그리고선 현관문 뒤에 숨겨둔 큰 꾸러미를 꺼내시며 어렵게 그리고 너무도 힘들게 말씀하신다. “ 우리 매느리 오기전에 가꼬 가라고 ”
“뭘요? ”
“ 이거 찹쌀 한말이여 내 인생 마지막 곡식이여 인자는 죽을때까정 내 손으로 농사는 못지으닝께.... 지발 부탁이여 가꼬가줘 잉 ”
내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큼직막하게 휘 저으니 다시 말씀을 이어가신다.
“ 고마워 가꼬 그랴 내가 낳은 자식들까정 사람 취급도 안해주고 무시하는디 내 야그 (이야기)도 잘 들어 주고 내가 뭐씨라고 말도 안되는 야기를 떠벌려도 그냥 웃어주고 무엇보담도 우리 할마씨헌테 너무 잘해줘 가꼬 내가 고마워서 그랴.... 알어 물 한잔도 안먹고 가야 한다는 거... 근디 이건 틀린거여 ..이건 내 목심 (목숨)과 같은거여 ... 인자는 나 다시는 땅 못 파묵응께.... 지발 거절하지 말고 받아줘.... 부탁이여 ....”
내 마음은 그 크신 선물을 벌써 받고 있었지만 난 직장인이고 아직 환자분과 나의 공적인 관계가 끝나지 않았으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난 간호사 아닌가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시기도 하고 눈가가 젖어 들면서 애원도 했지만 난 거절했다. 마음이 여러 갈래의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찢어지게도 아프고 갑자기 큰 호수만큼 잔잔해지게도 되고 마음이 롤로코스터를 탄 거처럼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죄송하다고 할아버지의 마음 다 받았다고 긴 시간을 아주 행복한 실랑이를 한 끝에 할아버지가 협상을 하자고 하신다. 큰 제과 회사를 다니는 조카가 항상 껌을 한 박스씩 가져다주는데 할아버지는 틀니라 껌을 씹을 수 없다며 그거라도 가지고 가라고 한다. 다른 식구들 드리라고 했더니 이젠 버럭 화를 내신다. 안가지고 가면 어차피 버려야 한다고 운전하고 다니면서 하나씩 씹고 다니란다. 너무 단호하시고 이제는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실 거 같아 껌 한 박스는 조용히 받기로 했다. 할아버지 선물의 의미를 전혀 모른 체 그냥은 절대로 받아갈 수 없었던 찹쌀 한말과 할아버지 역정이 무서워 조용히 협상한 껌 한 박스의 이름으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두툼한 껌 한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매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길게 길게 할아버지는 쳐다봐 주시며 늘 그러셨던 것처럼 배웅해 주시고 계셨다. 그리고 운전 조심하고 다니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그 일이 있은 지 한달쯤 지났을까 할아버지는 전주에 가셨다가 몸이 편찮으셔서 한동안 올라오지 못하고 계셨다.
할머니 곁은 정 없어 보이는 며느리가 지키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안 계셔서였을까 할머니 상태는 별 변화가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기운이 없어보인다. 언제나처럼 허공만을 보고 계시는데도.
며느리가 나에게 이야기 한다. “ 세상에 우리 아버님 비유 맞추는 사람은 아마 선생님 밖에 없을 거예요..” 긴 한숨을 쉬며 시아버지 시집살이 더 매섭다고 성격이 안 맞아서 힘들다고 한 동안의 푸념을 했다. 나도 이 나라의 며느리로 살고 있고 또 할아버지의 성격을 누구보다 아는 처지라 잠자코 들어드리고 있었다.(때로는 경청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큰 위로가 될 수도 있으닌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갑자기 저번 방문 때 받았던 껌 한 박스의 고마움을 전하지도 못한 이름도 모르는 제과회사에 다닌다는 그 조카가 궁금해서 내가 며느리에게 제과회사 다니는 조카가 있느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을 때 며느리는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비슷한 직종에 있는 조카도 없거니와 이집은 자식이 귀해서 친척도 별로 없다고 했다. 계속해서 며느리 목소리가 자꾸 귀에서 윙윙거리며 가슴이 미어진다. 눈에서 눈물이 뜨겁다는 생각을 하며 그 댁을 겨우 나왔다. 차안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그랬구나 ...나 일하며 졸까봐 할아버지가 준비한 선물이었구나 .....그리고 밥 챙겨먹고 건강히 살라는 할아버지의 또 한가지의 선물이 찹쌀이었던거였구나...” 할아버지의 사랑과 염려가 내가 그날 철없이 받아들었던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정말 한참을 가슴 미어지는 감동에서 헤매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전주에서 오셨고 그리고 두 달 정도 있다가 아예 할머니랑 전주 본가로 가셨다.
난 할아버지 선물의 의미를 알았다는 이야기를 끝까지 모른 체 하며 그리고 가시는 날 조카가 또 한 박스의 껌을 놓고 갔다는 거짓말에 감사하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내 드렸다.
그리고 명절만 되면 할아버지는 나 같은 사람에게 선생님이라고 하시며 안부를 물어 오신다.
난 이유 있는 설렘으로, 나와 같은 하늘아래 평온하심을 확인 할 수 있는 기대로, 감히 그분의 전화를 명절 때마다 기다리게 되었다.
올 추석에도 할머니는 허공만 바라볼지라도 할아버지 곁에 계시고 할아버지도 아직은 건강하시다는 전화를 받아든 나의 마음이 한결 가볍다.
이 부푼 마음으로 난 내년 설 명절을 조용히 기다려 본다.
추석날 아침 칠남매의 막내로 시집간 명절의 분주함속에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많은 식구의 매끼 식사와 명절준비를 하고 뒷정리를 해야하는 우리 며느리들의 명절 아침은 그냥의 아침이 아니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서 난 앞치마 속에서 수줍은 새색시 마냥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핸드폰을 여러차례 만지작 거리고 열어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요란하게 진동이 울린다. “선상님 나 전주 늙은이요 맹일은 잘 지내고 있소 ” 맛깔스런 전라도 사투리의 할아버지는 나의 안부를 묻는다. “어머 어르신 별일 없으셨어요 ?” 기다림이 티나지 않게 내가 조심스럽게 그리고 반갑게 대답한다. “나야 늘 그렇치라우 맨 하는 일이 그것잉께” 올해도 건강하고 우리 선생님이라 명절에 인사차 전화했다며 늘 하시는 말씀으로 밥 거르지 말고 운전할 때 조심하며 다니라고 하신다.
전주 할아버지와의 통화가 끝난 나의 가슴이 훈훈해진다. 어린시절 잠자기 싫어 괜히 투정부리는 내 등허리를 말없이 쓸어주시던 외할머니의 느낌 같기도 하고 서울에서의 긴 타향살이중에 간간이만 맛볼 수 있었던 엄마의 청국장맛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의 소중한 껌과 찹쌀 한말의 의미를 기억해 내본다.
가정간호팀으로 자리를 옮긴지 한 일년쯤 지난 어느 날 전주할아버지를 처음 뵈었을 때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마른체구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는 그렇지 않아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모습에 더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큰 미소를 지으며 반가와 하는 내 얼굴을 무색하게 표정없이 대충 쳐다보시는 모습과 너무도 짧게 끝나던 대답들.
내가 하는 일이나 완벽하게 실수하지 말고 잘 하라는 식의 전주할아버지의 태도가 너무도 불쾌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난 환자를 간호하기 위해 간 간호사가 아닌가 .....속이 상했지만 난 잘 참아내 가고 있었다.
“어르신 오늘은 기관지관을 교체했고, 콧줄(위관영양)은 다음주에 교체해 드릴거예요.” 최대한 부드러움과 예의를 갖추며 이야기하는 나에게 전주할아버지는 찬물을 확 끼얹는다. “목 소독한 거즈는 이렇코롬 허고 콧줄 반창고는 꼭 이렇게만 난 부칭께로 인자 우리집 와서는 간호사 양반도 그렇게 해주씨요.”하며 내가 소독햇던 거즈를 맨손으로 만지작 거리시고 위관영양 튜브의 고정 테이프 부치는 시범을 나에게 보이신다. 누가 간호사고 누가 환자보호자인지 잠시 어리둥절해 지는 순간이었다. 이쯤되니 나도 슬슬 기분이 상했지만 끝까지 참고 또 참으며 한마디를 했다 “보호자분 소독한 부위를 그렇게 맨손으로 만지시면 안되는데.....”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내게 할아버지는 일침을 한방 세게 놓아준다. “내가 맨 년을 이렇코롬 혀도 암 이상도 없었고 우리 할마씨는 내가 지일 잘 앙께 내 말디로 해주씨요”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아무 잘못도 없는 나의 폐배로 끝이 났다.
난 할아버지가 너무 싫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허공만 바라보는 환자인 할머님께 너무도 정성껏 대하시는 모습은 그 모습만은 너무도 좋았다. 아니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그냥 내 마음이 좋고 할아버지에 대한 비호감이 바로 호감으로 바뀔 수 있었던 건 내가 간호사이기 때문이리라.....
나와 할아버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나의 인내는 끈기를 낳았고 끈기는 이상하게 할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있음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너무 말씀이 없으셔서 할머니 간호보다 할아버지 눈치를 더 살핀 적도 있었고 어떤 날은 너무 기분이 좋으셔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쓸쩍슬쩍 꺼내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자식 때문에 어떤 날은 며느리 때문에 어떤 날은 호전도 없이 이렇게 누워만 계시는 할머니 때문에 우울해하시고 외로워하시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나와 두분과의 관계도 인연이라는 단어로 어느 정도는 묶여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가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 정도를 늦게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너무도 정확한 분이시라 될 수 있으면 시간약속을 잘 지키는 편인데 그날은 모든 일이 다 꼬였다) 전주 할아버지가 먼저 뭐라 하신 것도 아닌데 겁먹고 졸음 운전했던 차가 다른 차와 부딪쳐서 도로가 막혔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들어가는데 내 예상대로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신다.
늘 화난 표정이시기도 하고 할아버지를 이제는 누구보다 안다고 나름으로 자부하고 있던 터라 말없이 듣고 있는데 계속 듣고 있자니 그건 호통이 아니고 걱정을 소리 질러 해대고 계시는 거였다.
내가 아주 죄송해 하며 말한다 “걱정하셨어요? 죄송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뜬금없는 질문을 하신다 “운전하고 댕기믄 졸리기도 허고 그런당가 ” “그럴떄도 있기는 하는데 졸리면서까지 운전 많이 하고 다닐 정도는 아니닌까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가 이제는 조용한 소리로 대답하신다 “난 우리 고선상 안와갔고 뭔 일이 생겼는가 걱정이 되야서 저 큰길까정 나갔다가 혹시 딴길로 들어왔는가 싶어가꼬 지금 막 부랴부랴 들어오고 있는 길이당께” 말씀하시는 얼굴을 자세히 뵈니 이마에 땀이 맺혀 있다. 가슴이 봄비에 푹 젖는 느낌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별거 아닌 일에 감사할 떄가 더 많고 별거 아닌 어떤 이유가 삶을 지키게도 도와주고 정말 별거 아닌 일에 뜨거운 눈물을 보이게도 되는 것 같다.
할아버지와 가정간호사의 정성 안에서도 할머니의 병세는 호전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주치의가 예상했던 것처럼 나빠지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도 별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고 나도 할머니가 그렇게 그 침대에서 할아버지 곁을 지켜주심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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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할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잠깐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주문을 하셨다.(별로 나에게 부탁하시지도 않고 늘 바쁜 나를 걱정해서 혹 침상이라도 같이 정리해드릴라 치면 그것까지도 미안해 하시던 분이라 그날은 의아했다.) 그러시면서 할아버지의 인생을 고해하시듯 나에게 털어놓으신다. 젊은 시절 집안일은 돌보지도 않고 밖으로만 돌았다고, 그래서 할머니와 자식들이 고생이 많았다고, 사실 늙어서 할머니가 먼저 저렇게 쓰러진걸 보니 저 누운 자리가 당신 자리인 것 같아 더 미안하다고, 이제는 속죄하는 맘으로 잘해주고 싶다고, 죽는 날까지 편하게 해주다가 같이 저 세상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불혹도 안 된 나에게 희수의 노인이 눈물을 가득 담고 말씀을 하신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씩 내려가 밭도 보고 논도 돌보았는데 이젠 나이도 많이 먹고 할머니 간호하시기에도 버거워서 올해로 농사도 끝내고 다른집에 맡겨야겠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내내 쓸쓸해 하신다. 이젠 나에겐 마른 체구의 할아버지 얼굴도 신경질인 모습도 툭 불거져 나온 광대뼈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때처럼 난 아무것도 모르고 허공만 응시하는 할머니에게 뭐라뭐라 계속 이야기를 들려 드리면서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할아버지의 모습이 이상하게 분주하게 느껴졌다. 꼭 할말을 다 못하신 듯 자꾸 내 눈치만 보신다.
“잉 다 끝나거여.. ” 하시면서 주섬주섬 나의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나가신다.(늘 할아버지는 일이 끝난 나의 방문가방을 현관까지 가져다 주셨다.)
그리고선 현관문 뒤에 숨겨둔 큰 꾸러미를 꺼내시며 어렵게 그리고 너무도 힘들게 말씀하신다. “ 우리 매느리 오기전에 가꼬 가라고 ”
“뭘요? ”
“ 이거 찹쌀 한말이여 내 인생 마지막 곡식이여 인자는 죽을때까정 내 손으로 농사는 못지으닝께.... 지발 부탁이여 가꼬가줘 잉 ”
내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큼직막하게 휘 저으니 다시 말씀을 이어가신다.
“ 고마워 가꼬 그랴 내가 낳은 자식들까정 사람 취급도 안해주고 무시하는디 내 야그 (이야기)도 잘 들어 주고 내가 뭐씨라고 말도 안되는 야기를 떠벌려도 그냥 웃어주고 무엇보담도 우리 할마씨헌테 너무 잘해줘 가꼬 내가 고마워서 그랴.... 알어 물 한잔도 안먹고 가야 한다는 거... 근디 이건 틀린거여 ..이건 내 목심 (목숨)과 같은거여 ... 인자는 나 다시는 땅 못 파묵응께.... 지발 거절하지 말고 받아줘.... 부탁이여 ....”
내 마음은 그 크신 선물을 벌써 받고 있었지만 난 직장인이고 아직 환자분과 나의 공적인 관계가 끝나지 않았으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난 간호사 아닌가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시기도 하고 눈가가 젖어 들면서 애원도 했지만 난 거절했다. 마음이 여러 갈래의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찢어지게도 아프고 갑자기 큰 호수만큼 잔잔해지게도 되고 마음이 롤로코스터를 탄 거처럼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죄송하다고 할아버지의 마음 다 받았다고 긴 시간을 아주 행복한 실랑이를 한 끝에 할아버지가 협상을 하자고 하신다. 큰 제과 회사를 다니는 조카가 항상 껌을 한 박스씩 가져다주는데 할아버지는 틀니라 껌을 씹을 수 없다며 그거라도 가지고 가라고 한다. 다른 식구들 드리라고 했더니 이젠 버럭 화를 내신다. 안가지고 가면 어차피 버려야 한다고 운전하고 다니면서 하나씩 씹고 다니란다. 너무 단호하시고 이제는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실 거 같아 껌 한 박스는 조용히 받기로 했다. 할아버지 선물의 의미를 전혀 모른 체 그냥은 절대로 받아갈 수 없었던 찹쌀 한말과 할아버지 역정이 무서워 조용히 협상한 껌 한 박스의 이름으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두툼한 껌 한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매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길게 길게 할아버지는 쳐다봐 주시며 늘 그러셨던 것처럼 배웅해 주시고 계셨다. 그리고 운전 조심하고 다니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그 일이 있은 지 한달쯤 지났을까 할아버지는 전주에 가셨다가 몸이 편찮으셔서 한동안 올라오지 못하고 계셨다.
할머니 곁은 정 없어 보이는 며느리가 지키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안 계셔서였을까 할머니 상태는 별 변화가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기운이 없어보인다. 언제나처럼 허공만을 보고 계시는데도.
며느리가 나에게 이야기 한다. “ 세상에 우리 아버님 비유 맞추는 사람은 아마 선생님 밖에 없을 거예요..” 긴 한숨을 쉬며 시아버지 시집살이 더 매섭다고 성격이 안 맞아서 힘들다고 한 동안의 푸념을 했다. 나도 이 나라의 며느리로 살고 있고 또 할아버지의 성격을 누구보다 아는 처지라 잠자코 들어드리고 있었다.(때로는 경청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큰 위로가 될 수도 있으닌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갑자기 저번 방문 때 받았던 껌 한 박스의 고마움을 전하지도 못한 이름도 모르는 제과회사에 다닌다는 그 조카가 궁금해서 내가 며느리에게 제과회사 다니는 조카가 있느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을 때 며느리는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비슷한 직종에 있는 조카도 없거니와 이집은 자식이 귀해서 친척도 별로 없다고 했다. 계속해서 며느리 목소리가 자꾸 귀에서 윙윙거리며 가슴이 미어진다. 눈에서 눈물이 뜨겁다는 생각을 하며 그 댁을 겨우 나왔다. 차안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그랬구나 ...나 일하며 졸까봐 할아버지가 준비한 선물이었구나 .....그리고 밥 챙겨먹고 건강히 살라는 할아버지의 또 한가지의 선물이 찹쌀이었던거였구나...” 할아버지의 사랑과 염려가 내가 그날 철없이 받아들었던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정말 한참을 가슴 미어지는 감동에서 헤매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전주에서 오셨고 그리고 두 달 정도 있다가 아예 할머니랑 전주 본가로 가셨다.
난 할아버지 선물의 의미를 알았다는 이야기를 끝까지 모른 체 하며 그리고 가시는 날 조카가 또 한 박스의 껌을 놓고 갔다는 거짓말에 감사하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내 드렸다.
그리고 명절만 되면 할아버지는 나 같은 사람에게 선생님이라고 하시며 안부를 물어 오신다.
난 이유 있는 설렘으로, 나와 같은 하늘아래 평온하심을 확인 할 수 있는 기대로, 감히 그분의 전화를 명절 때마다 기다리게 되었다.
올 추석에도 할머니는 허공만 바라볼지라도 할아버지 곁에 계시고 할아버지도 아직은 건강하시다는 전화를 받아든 나의 마음이 한결 가볍다.
이 부푼 마음으로 난 내년 설 명절을 조용히 기다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