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문학상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08-03-12 오후 16:06:41

김천 개령서부초등학교 보건교사 한지영

은은한 국화 향에 취한 듯 가을빛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불혹의 가을, 쏜살같이 가버리는 시간들을 뒤쫓느라 늘 헉헉거린다. 그래도 오늘은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쏟아질 것 같은 쪽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맑은 기운을 마음 안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단발머리 찰랑이던 시절에 즐겨 외웠던 시 한 편을 찾아 목소리를 가다듬어 읊어도 보았다.

지난 한글날, 김천교육청에서 실시한 교육혁신 연수회에 다녀왔다. 그 날 ‘성공한 사람들’이란 주제로 특강을 하신 분이 중학교 때 존경의 마음을 드린 국어선생님이셨다. 금테 안경의 맑은 모습으로 한 손엔 대나무 자락을, 또 다른 한 손엔 분필통과 국어책을 들고 우리를 찾으셨던 L선생님.
국어시간이면 마음을 담아 들려주시던 좋은 말씀에 귀를 쫑긋했고 어느새 내 가슴 한켠엔 국어선생님의 꿈이 살며시 들어와 앉아 있었다.

새하얀 칼라의 검정색 교복을 입고서 꿈 찾기가 한창이던 그 시절,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마음 안으로 떨어져 내렸고, 은은한 달빛 아래 외운 한 편의 시들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되어 주었다. 꿈을 이루어 그 아름다운 기억을 우리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또 꿈을 주신 선생님을 찾아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야지 했었다.

그러나 찬바람에 가슴까지 시리던 날, 대학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 석 자를 찾지 못했다. 어려웠던 가정형편에 삼남매의 맏이였기에 자신의 꿈을 끝까지 고집하지 못한 채 1986년 겨울이 가고 있었다.

“미안하다. 재수 못 시키는 아버지를 이해해라. 지영아 미안하다.”

주름진 당신의 모습을 보며 오직 하나를 위해 달려왔던 길에서 멈추어 서고 말았다. 맏이로 태어난 자신이 원망스러워 가족들 몰래 흐느끼며 눈물을 삼켰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는 친구들의 설득, 간호전문대로 진학하면 양호교사가 되어 학교로 나갈 수 있다는 담임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비록 국어선생님의 꿈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보건교사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햇살처럼 밝은 모습의 우리 아이들을 매일 만나고 있다. 늘 웃는 모습이 예쁘다는 아이들의 칭찬에 많이 웃어주는 좋은 선생님이 되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보내온 날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국어선생님의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다시 태어나면 꼭 그 꿈을 이루리라 마음속에 새기고 또 새기는 날들이다. 어느덧 인생의 가을을 시작한지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도 말끝마다 “나중에 성공하면…”을 달고 있다. 그런데 그 날 L선생님께서 성공한 사람의 또 다른 의미를 알려주셨다.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긍정적인 사고, 부지런함, 정직과 친절, 자신과의 긍정적인 대화’를 성공한 사람의 공통점이라 하시며 좋은 선생님이 되길 당부하며 떠나셨다.

L선생님의 귀한 말씀을 듣는 동안 살아온 만큼의 세월을 더 살지도 모를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국어선생님들. 그 분들을 만날 때마다 이루지 못한 내 꿈이 되살아나 재수를 선택하지 못했던 그 때가 늘 후회로 남아 있었다. 이젠 그 남은 찌꺼기를 훌훌 털어내려 한다. 딸에게 의도적으로 국어선생님의 꿈을 심으려한 엄마의 강요도 이젠 뽑아버려야겠다. 스스로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그렇게 바라만 보아야겠다.

가을이 깊어가는 밤, 국어사전을 옆에 둔 채 내 마음을 쏟아내는 이 일이 참으로 즐겁다.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낙엽을 쓸 듯 글쓰기를 하고 또 하면 언젠가는 성공한 제자의 모습을 담은 수필집 한권을 L선생님께 선물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데 수필집 제목은 무엇으로 하지? 아~ 맞다. ‘후회하지 않는 삶’
내 마흔의 가을이 어찌 이리도 아름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