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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간호문학상 수상작품 - 소설 당선작
뒷산 억새 (김 성 실·광주기독병원)
[편집국] 편집부 news@nursenews.co.kr 기사입력 2002-12-20 오전 09:03:42
링겔병이 바닥에 떨어져 퍽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낸다. 할아버지의 오른팔에 간신히 매달린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휘두른 팔에 떠밀려 침대에 나동그라진다.
"어떤 놈이 내가 암이라고 그랴? 여태까정 감기한번 안 걸려본 나여. 아 할망구도 잘 알잖여! 그 새파란 의사 놈이 그렸어?"
박 간호사와 내가 할아버지의 팔을 잡으려고 달려들자 할아버지는 수액 줄과 주사바늘을 뽑아서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팔뚝에서 쏟아진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튄다. 경비실 직원을 부르려다가 암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주춤한다.
"영감이 오줌이 잘 안나오니께 약을 쬐끔 써야한다고 혔지, 누가 암이라고 혔다고 생떼를 쓰요?"
할머니는 피가 흐르는 할아버지의 팔에 수건을 두르더니 책망하듯 할아버지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박 간호사가 부리나케 가져온 빗자루를 뺏어들고 재빨리 유리파편들을 쓸어 담는다. 할머니의 부지런한 몸놀림 때문인지,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수군대는 환자들 때문인지 양봉수 할아버지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할아버지는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긴 수염을 몇 번 쓸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고함을 지른다.
"여기 간호사양반. 새걸루다 빳빳한 걸로 옷 좀 줘야쓰겄어."
하얀 약 봉지를 벌려서 약병들을 바구니에 쏟는다. 하나라도 떨어져 깨지면 큰일이다. 약 봉지를 세워 낮게 여러 번 털어낸 다음 항암제 병을 하나씩 테이블 위에 세운다. 버려진 흰 약 봉지가 문득 억새의 하얀 대궁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 오전 8시가 넘었는데도 밖은 아직 희끄무레하다. 형광등 불빛이 어두운 바깥 풍경 속으로 흩어지더니 뒷산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다. 이제 보니 뒷산의 단풍은 더욱 붉어져 있다.
기숙사 아래 새로 단장한 영안실 안으로 상복을 입은 몇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방음 유리문을 달고 분향소를 깊숙이 숨겨놓은 뒤로 지금은 곡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일은 없다. 몇 해 전만 해도 허술한 영안실 건물 이곳 저곳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곡소리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친구는 가끔씩 기숙사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며 괴로워했었다. 환자들이 곡소리를 피해 뒷산에 숨어들었다가 간혹 미치광이가 되거나 자해를 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해져서 나는 창문을 꼼꼼히 닫아건다.
매직을 들어 환자의 이름을 약병에 적는다. 양봉수. 또박또박 쓴 글씨를 두세 번 확인한다. 잉크냄새가 잠시 코를 찔렀지만 이내 알코올 냄새에 묻혀버린다. 약병 뚜껑을 모두 벗겨낸 다음 마스크로 얼굴을 넓게 가린다. 소독장갑을 꺼내 장갑 안으로 손가락들을 깊숙이 찔러 넣는다. 손바닥에 달라붙은 노란 고무를 몇 번 튕겨서 파우더 가루를 털어내버리자 고무의 탄력이 손가락을 조여와 서늘한 느낌마저 든다.
그 조이는 느낌이 나한테는 익숙하다. 응급환자가 생겼을 때, 먹는 약이나 주사를 준비할 때, 의사의 처방에 따라 환자에게 수액이나 심지어 배식을 할 때도 나는 가슴팍이 조여온다. 나의 세포들은 쉴새없이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병이 도진 건지도 모른다. 시계를 들여다 본다.
오전 여덟시 삼십분. 환자들에게 수액을 놓기까지 삼십분 정도 여유가 있다. 안심이 된다. 허리를 쭈욱펴고 심호흡을 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신속 정확하게 간호를 시행하고, 기록하고, 확인하자는 나의 오래된 다짐이 기계한테나 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이번에는 약병을 들어 고무마개에 주사기를 꽂고 약물을 남김없이 뽑아낸다. 약물 한방울이 손에 떨어진다. 잠시 섬뜩했지만 아무리 독한 항암제라 해도 고무 장갑을 뚫지는 못한다. 송군과는 별 일 없는 거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손등에 떨어진 약물을 타고 살 속을 파고드는 것 같다. 실반지가 빠져나간 약지 손가락이 아파온다. 뽑아낸 약물이 든 주사기의 바늘을 이번에는 식염수 병 속에 찔러 넣고 서서히 밀어넣는다. 나머지 약들도 그렇게 식염수 안으로 들어가 제 몸을 섞는다. 오늘은 붉은 색이 나는 항암제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양봉수 할아버지는 약 색깔로도 자신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며칠째 먹는 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어떤 병에 쓰는 약인지 꼬치꼬치 캐묻던 할아버지의 질긴 눈빛이 떠오른다.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할머니의 염려대로 할아버지는 자신이 전립선암에 걸린 것을 알아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속이 비어버린 약병들을 분리수거통에 버리면서 나는 괜한 걱정을 한다.
오후 두시, 그가 억새를 한아름 안고 나타난다. 환자복을 벗어버린 그는 편안해 보인다. 늘 입던 회색 점퍼가 오늘은 티가 나게 헐렁해 보인다. 옷과 머리에 묻은 억새 꽃술을 손으로 털어내며 간호사실로 다가온다. 억새풀 반을 뚝 떼어
"어떤 놈이 내가 암이라고 그랴? 여태까정 감기한번 안 걸려본 나여. 아 할망구도 잘 알잖여! 그 새파란 의사 놈이 그렸어?"
박 간호사와 내가 할아버지의 팔을 잡으려고 달려들자 할아버지는 수액 줄과 주사바늘을 뽑아서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팔뚝에서 쏟아진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튄다. 경비실 직원을 부르려다가 암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주춤한다.
"영감이 오줌이 잘 안나오니께 약을 쬐끔 써야한다고 혔지, 누가 암이라고 혔다고 생떼를 쓰요?"
할머니는 피가 흐르는 할아버지의 팔에 수건을 두르더니 책망하듯 할아버지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박 간호사가 부리나케 가져온 빗자루를 뺏어들고 재빨리 유리파편들을 쓸어 담는다. 할머니의 부지런한 몸놀림 때문인지,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수군대는 환자들 때문인지 양봉수 할아버지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할아버지는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긴 수염을 몇 번 쓸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고함을 지른다.
"여기 간호사양반. 새걸루다 빳빳한 걸로 옷 좀 줘야쓰겄어."
하얀 약 봉지를 벌려서 약병들을 바구니에 쏟는다. 하나라도 떨어져 깨지면 큰일이다. 약 봉지를 세워 낮게 여러 번 털어낸 다음 항암제 병을 하나씩 테이블 위에 세운다. 버려진 흰 약 봉지가 문득 억새의 하얀 대궁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 오전 8시가 넘었는데도 밖은 아직 희끄무레하다. 형광등 불빛이 어두운 바깥 풍경 속으로 흩어지더니 뒷산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다. 이제 보니 뒷산의 단풍은 더욱 붉어져 있다.
기숙사 아래 새로 단장한 영안실 안으로 상복을 입은 몇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방음 유리문을 달고 분향소를 깊숙이 숨겨놓은 뒤로 지금은 곡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일은 없다. 몇 해 전만 해도 허술한 영안실 건물 이곳 저곳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곡소리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친구는 가끔씩 기숙사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며 괴로워했었다. 환자들이 곡소리를 피해 뒷산에 숨어들었다가 간혹 미치광이가 되거나 자해를 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해져서 나는 창문을 꼼꼼히 닫아건다.
매직을 들어 환자의 이름을 약병에 적는다. 양봉수. 또박또박 쓴 글씨를 두세 번 확인한다. 잉크냄새가 잠시 코를 찔렀지만 이내 알코올 냄새에 묻혀버린다. 약병 뚜껑을 모두 벗겨낸 다음 마스크로 얼굴을 넓게 가린다. 소독장갑을 꺼내 장갑 안으로 손가락들을 깊숙이 찔러 넣는다. 손바닥에 달라붙은 노란 고무를 몇 번 튕겨서 파우더 가루를 털어내버리자 고무의 탄력이 손가락을 조여와 서늘한 느낌마저 든다.
그 조이는 느낌이 나한테는 익숙하다. 응급환자가 생겼을 때, 먹는 약이나 주사를 준비할 때, 의사의 처방에 따라 환자에게 수액이나 심지어 배식을 할 때도 나는 가슴팍이 조여온다. 나의 세포들은 쉴새없이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병이 도진 건지도 모른다. 시계를 들여다 본다.
오전 여덟시 삼십분. 환자들에게 수액을 놓기까지 삼십분 정도 여유가 있다. 안심이 된다. 허리를 쭈욱펴고 심호흡을 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신속 정확하게 간호를 시행하고, 기록하고, 확인하자는 나의 오래된 다짐이 기계한테나 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이번에는 약병을 들어 고무마개에 주사기를 꽂고 약물을 남김없이 뽑아낸다. 약물 한방울이 손에 떨어진다. 잠시 섬뜩했지만 아무리 독한 항암제라 해도 고무 장갑을 뚫지는 못한다. 송군과는 별 일 없는 거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손등에 떨어진 약물을 타고 살 속을 파고드는 것 같다. 실반지가 빠져나간 약지 손가락이 아파온다. 뽑아낸 약물이 든 주사기의 바늘을 이번에는 식염수 병 속에 찔러 넣고 서서히 밀어넣는다. 나머지 약들도 그렇게 식염수 안으로 들어가 제 몸을 섞는다. 오늘은 붉은 색이 나는 항암제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양봉수 할아버지는 약 색깔로도 자신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며칠째 먹는 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어떤 병에 쓰는 약인지 꼬치꼬치 캐묻던 할아버지의 질긴 눈빛이 떠오른다.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할머니의 염려대로 할아버지는 자신이 전립선암에 걸린 것을 알아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속이 비어버린 약병들을 분리수거통에 버리면서 나는 괜한 걱정을 한다.
오후 두시, 그가 억새를 한아름 안고 나타난다. 환자복을 벗어버린 그는 편안해 보인다. 늘 입던 회색 점퍼가 오늘은 티가 나게 헐렁해 보인다. 옷과 머리에 묻은 억새 꽃술을 손으로 털어내며 간호사실로 다가온다. 억새풀 반을 뚝 떼어
